2012년 암스테르담
@1. 밀레의 <만종>과 교감
예술의 전당에서는 수많은 전시와 공연이 펼쳐진다. 주로 나는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갔다. 2011년 오르세 미술관 전시회를 처음 보러 갔다. 유명한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앞 뒤로 밀려서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웠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은 오래전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봐 온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진품으로 보게 된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보다 그림은 크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 시간대에 이 그림 앞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략 30분 정도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적당한 거리에서 그리고 점점 더 멀리서, 그리고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다시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온전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들판에 서있는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림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림을 감상하는데 특별한 원칙이 있거나 이론적인 접근이 있겠지만 그냥 순수한 나의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어떤 설명도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직 그림만 보았다.
세밀한 붓터치를 통해 전체의 풍경과 두 사람, 쟁기와 먹을 것을 담은 바구니, 일을 마친 두 사람이 기도하는 장면은 성당에 와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노을이 물든 하늘, 멀리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주변 풍경들. 대지는 생명을 일구어내는 곳이고 대지와 하늘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닐까? 이 체험은 그림을 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은 원본을 감상해야 한다는 것과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림과 교감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
@2. 까마귀가 나는 밀밭
2012년 여름 암스테르담을 향했다. 고흐의 전기를 다룬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라는 책을 두 번 읽으면서 고흐의 그림과 그의 치열한 삶, 그리고 그의 내면에 관한 얘기들을 책을 통해 읽고 화보집을 사서 가끔씩 들여다보았기에 고흐 미술관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 단 50분만 내게 주어졌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정신없이 이 작품 저 작품 바삐 쫓아다닌 결과 내 인상에 강렬하게 남은 그림이 거의 없다. 어느 작품에 집중할 것인지 미리 정하지 않으면 시간만 허비하게 될 터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색상대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 앞에 우선 서봤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그의 강렬한 붓터치가 온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물감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표현법이다. 테오와 수많은 편지 속에서 끊임없이 재료비를 걱정하는 그의 메시지가 금방 이해되었다. 자세히 보니 한 번의 터치에 표현된 색감이 같은 느낌이 거의 없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달랐다. 다름 속에서 전체적으로 누런 들판을 만들고, 색감이 각기 다른 하늘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붓터치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의 꿈틀대는 열정과 의지가 담긴 힘이 느껴졌다. 그림의 구도를 볼 줄 모르지만 개별 붓터치가 부분의 구도를 만들고 부분들이 전체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부분과 전체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부분은 전체를 위해 전체는 부분을 위해. 순간 포착한 것인지 아니면 긴 기간을 두고 포착한 장면인지 알 수 없지만,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느낌. 그렇다고 몽환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갈 수 있는 친근한 들판처럼 여겨졌다. 30분 머무는 시간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흘러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해있었다.
@3. 자화상
더 머물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고흐 미술관에 전시된 고흐의 작품은 대략 200편이 넘는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자화상중 유독 나는 이 작품에 시선이 머물렀다. 시계를 보니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먼저 그의 머리카락을 살펴보았다. 역시 붉은색이 주류를 이루지만 다양한 색들이 칠해져 있었다. 같은 색은 거의 없고 조금씩 다른 색감들이다. 얼굴도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다양한 색과 특히 붉은 색깔로 칠해졌지만 부분 부분 같은 느낌이 없다. 뭔가 그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의 시선은 캔버스가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캔버스 뒤의 조금 먼 곳을 응시하는데 그 눈빛은 완전히 몰입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대개의 인물화들이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를 하려고 하는 것과 달리 고흐의 자화상은 거칠고 붓터치는 강렬하다.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파란 옷에 점점이 박혀있는 노란 계통의 색상들은 마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킨다. 자신을 하늘로 두르고 있는 듯하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몸으로 두르고 있으니 정말로 자신을 위대한 화가로 생각했을 것 같고, 실제로 그는 위대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왔다. 다시 올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적어도 이틀 정도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긋하게 감상하리라.
@4. 고흐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
돌아온 뒤 서점에서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서신과 그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많은 그림이 담겨있는 책을 샀다.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본다. 미술관에서의 직관 경험은 그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게 했다. 물론 원본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한 줄기 햇살처럼 눈부신 붓터치들이 어느 그림이건 들어있어서 그 그림이 전달하고자 했던 그의 따뜻한 메시지가 들리는 듯하다.
고흐가 그린 밀레 <만종>의 습작 그림이다. 원작의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다른 느낌이 들어온다. 이렇게 좋은 그림을 많이 습작한 것이 그의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게 했을 것이다. 그가 밀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Vincent Van Gogh>에서 옮겨본다.
@5. 현실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1885년 어느 날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에서>
내가 보기에 밀레와 레르미트야말로 진정한 화가란다. 밀레나 레르미트나 미켈란젤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무미건조하게 분석적으로 관찰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느낌대로 그리기 때문이지. 내가 정말로 배우고 싶은 건 바로 그렇게 현실을 바꾸고, 교정하고, 이탈하며, 부정확한 모습들로 표현하는 거야. 그래서 그것들이 글자 그대로의 진실보다 더 유용한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 되기를 바란단다.
이제 서둘러 편지를 마쳐야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어. 농부들이나 서민들의 삶을 그리는 화가들은 세상살이에 능한 사람들로 분류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국적인 하렘의 풍경이나 추기경들의 접견처럼 파리에서 유행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보다 결국은 더 오래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