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적한 일들을 제쳐두고
서른 즈음에 나는 학교 근처 노래방에 혼자 가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수십 번도 더 부르며 서른에 진입하는 나이를 서러워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서른은 어른으로 가는 이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전망이 불확실하고 밀려오는 일들과 팍팍한 일상의 삶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많아서였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과거는 현재 속에서 재구성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이 없고 그래서 돌아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의 삶의 기준 속에서 내 마음대로 재구성하기 때문에.
삼십 대 후반에는 밀려들어오는 일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일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다.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여행기회는 바쁠 때 찾아온다. 산적한 일은 산적해 있으라고 하고 나는 약간은 무거운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일본은 처음 가보니 당연히 설렌다. 일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낮은 기대치가 오히려 가슴 깊이 울리는 추억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2. 떠나기 전
고등학교 3년 동안을 객지에서 유학하면서 늘 하던 버릇이 있다. 잔뜩 공부할 거리를 싸가지고 와서는 먹고 잠만 자다가 그대로 들고 간다. 여행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잔뜩 짐을 싸는데 꼭 책을 서너 권 준비한다. 제대로 읽지도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이번에도 책을 네 권이나 들고 간다. 결국 1권만 다 읽었다. 언제쯤이면 홀가분하게 갈 수 있을까? 여행은 새로운 텍스트를 경험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범위에는 경치, 사람, 음식과 순간순간의 경험이 포함된다. 경직된 생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갑자기 시카고의 <Hard habit to brake> 노래가 떠오른다.
또 하나 여행을 가면서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 부모님과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나만 다녀온다는 것. 좋은 곳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고 오는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잘 간직해서 다음에 같이 갈 때는 내가 안내자가 되리라고 대충 얼버무린다. 언제가 될 것인가? 결국 아버님과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보지 못하고 작별해드리고 말았다. 건강을 많이 회복하셨지만 어디 여행 다닐 상황은 아닌 어머님도 그렇고. 가족들에게는 그래도 덜 미안하다.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옛 말이 맞는 말씀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부모님에 대한 자식들의 부족함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는 하는데 왠지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박구용 교수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존경하라는 가르침들이 부모님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를 제대로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메시지도 전하지만, 역시 부모님에 대해서는 마음이 무겁다.
@3. 비행기를 탄다는 일
1998년 제주도 워크숍 때문에 출장 갈 때 다시 비행기를 탔다. 1달 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고소공포 증으로 생각되었으나, 고소공포증은 아니었고 막연한 두려움을 내가 확대 재생산해서 공포를 1995년 결혼 후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때 너무도 피곤하고 졸렸지만 방콕에 도착하는 6시간 동안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대만을 경유할 때 타이베이 공항에서 세 차례나 턴오버를 경험하면서 비행기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7살 되던 해 4m 되는 다리에서 추락한 경험은 비행기를 탈 때마다 온몸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이 트라우마가 있어서 적절한 긴장감을 갖고 사는 것은 좋지만, 긴장이 지나치면 스트레스가 되어 좋은 기분을 망치게 된다. 배가시키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2002년 동생과 다른 볼일로 미국을 갈 때 9번인가 비행기를 탔는데 어휴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래도 정신없이 다녔다. 물론 나리타를 경유해서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이제 비행기 타는 일도 잦아지고 유럽을 두 번 다녀오고 해서 그런지 이번 여행에서는 비행기 타는 일이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경험치들을 어떻게 늘리고 그 질적인 부분을 어떻게 더 낫게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여행에 최고의 동반자는 책과 음악이다. 이 친구들이 없으면 얼마나 무료하고 심심한 여행이 될 것인가? 바깥의 경치나 이 모든 경관들은 책이나 음악과 결합되어 나에게 강력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음악의 느낌과 책의 내용 역시 그 경관들이나 경험과 결 합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따라서 여행은 이 두 친구들을 통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륙할 때의 짜릿함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감은 적당한 고도에서 비행기가 자세를 잡자 풀렸다. 김용운 변리사는 2006년에 나와 같이 일을 하기 전에는 대한항공의 기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같이 출장 갔을 때 옆자리에 앉아 비행기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이 시간 전 세계 3만 대의 비행기가 동시에 떠 있다고. 항공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비행기는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있다고. 기장들은 다양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어서 100% 안전하다고 얘기해주었다.
날아가는 동안 이상하게 그런 메시지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행히 오늘은 비행기 운행 중 터뷸런스를 거의 겪지 않았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4. 도쿄의 맑은 공기와 북소리
도쿄의 공기는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다. 서울보다 인구가 많음에도 이러한 공기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이 부럽다. 중국가 인접하지 않아 직접적인 공기 피해를 입지도 않고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있어서 자연적인 혜택도 분명 있을 것이다. 도쿄에서는 맑은 공기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내 중심가로는 경유차량 진입을 통제한다. 자동차들의 연비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리터당 20KM가 넘는 차종들이 많다고 한다.
도요다 자동차 쇼 룸에 진열되어 있는 차들을 보면서 일본 자동차 기술의 우위에 대한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자동차 연비에 너무 관대하다. 크고 넓은 자동차를 선호하는 경향 그리고 자동차를 타는 수단보다는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능과 성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전시된 자동차들이 아주 멋지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문화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자동차 문화가 실용적인 관점으로 바뀐다면 거기에 맞게 기술은 발전할 것이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보다는 문화의 차이다. 기술도 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무료한 나의 귓가를 두드리는 북소리. 잠시 전부터 무대를 준비하더니 그곳인가?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니 20여 명의 어린이와 중,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무리가 북을 두드리면서 놀이판을 벌이다. 현대적인 가락과 어울린 북소리가 이채롭게 들린다. 이들이 북을 두드리는 동작은 아주 단순하다. 난타 공연, 국악 공연에서 북소리리는 화려하고 기술도 대단하다. 사방을 향해 한 발씩 옮겨 놓으면서 한 번씩 두드리는 단순한 동작이다. 기운찬 동작과 기백이 제법이다. 다리를 벌리는 동작은 싸우기 전 스모 선수의 자세와 흡사하다. 출정하기 전에 사기를 돋우기 위해 두드리는 북소리로 들린다. 기수들은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킨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마당놀이와 마 찬 가지로 모두 같이 어울러 북을 두드린다. 적당히 호응도 있고 보기 좋다.
@5. 화폐의 유용성
일본 와서 처음 돈을 써본다. 녹차 한 병을 샀다. 가격은 120엔. 편의점에서 사면 5%의 소비세가 붙고, 자판기에서 사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저기 자판기의 천국이다. 잠시 다른 룸을 들여다보니 파친코 놀이를 어른도 아이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우리는 사행심 조장한다고 절대 말렸을 텐데 엄마가 동전을 아이에게 계속 주고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내기 놀이도 진화한다. 초등학교 때는 길거리에서 껌종이를 주워 내기를 한다. 껌이 귀하던 시절이었기에. 미니 만화가 붙어있는 껌도 기억이 난다. 병뚜껑을 주워와 가장자리를 펴서 화폐처럼 서로 내기를 했다. 구슬치기와 구슬 삼치 기는 이보다 진화된 모델이다. 중학교에 와서는 아예 동전 먹기를 한다. 서로 푸푸 불어서 동전이 상대방 동전 위에 올라가면 먹는다. 그러다가 동전 삼치 기를 한다. 고등학교 때는 어른들을 흉내 내며 고스톱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파친코 못지않은 돈거래 놀이를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