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나무 Feb 19. 2021

봄기운을 손짓하는 시래기 명태조림

약식동원(藥食同源) #1

오전에 어머님 계신 요양병원을 찾기 위해 전화를 드렸다.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여쭈어보니 올 필요 없다고 하신다. 두 동생이 이미 하루 간격으로 명절 인사를 다녀갔던 터라 다음 주에 오라고 말씀하셨다. 늦잠을 잘까 하다가 아내와 집안 청소를 하자고 했다. 아마도 봄기운이 사르르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몸에도 전해 져서였을 것이다.


마이크로 바이옴을 공부하면서 장내 미생물의 존재를 발견하고 장에 좋은 음식들을 생각하는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미세한 존재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내가 자고 있는 잠자리의 진드기나 세균들과 바이러스들, 그리고 미세먼지들 등 이렇게 작은 것들과 공존하는 삶이 실감 나지는 않지만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삶의 진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에 쌓인 먼지는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 먼지를 닦아내는 일은 꺼림칙하지만 개운하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늘 딜레마에 빠진다. 읽어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항상 모호하다. 버리려고 하면 꼭 다시 꺼내서 읽을 것만 같아 먼지를 닦은 뒤 다시 책장에 꽂아두기를 한 시간 가까이 씨름하며 겨우 몇 권을 꺼낸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지내던 책들과 인사를 한다. 읽었던 책들보다 읽지 않은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허영심으로 책을 사는 일은 이제 관둬야겠다고 다짐한다. 과감히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저렇게 책장에 모셔두기도 멋쩍은 책들이 나에게 인상을 쓰는 것 같다.


오랜만에 책장의 윗부분에까지 손이 간다. 선반 쪽 먼지를 닦아내며 거기 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액자에도 손이 간다. 가장 애착이 가는 내 얼굴을 그린 캐리커쳐는 스타트업 대표가 만들어준 귀한 선물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들기도 했다. 한참 사업을 벌여나가던 시점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농담처럼 회사 입구에 내 캐리커쳐를 붙여놓았다고 했다. 농담 아니냐고 하자 곧바로 직원을 시켜 택시로 캐리커쳐 액자를 보내왔다. 한편으로는 놀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사업 초기에 몇 마디 조언을 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던 추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실 한쪽을 가로막고 있던 소파와 문 앞에서 약간의 편리함을 도모하던 책장을 과감하게 버리고 나니 시장기가 밀려온다. 익숙한 음식점을 가기는 쉽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는 데는 약간 부담된다. 공영주차장 바로 옆 가게라서 늘 눈길이 갔지만 선뜻 가보지 못한 가게를 들어선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단어는 단연코 시래기다. 명태조림과 시래기의 조합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기대가 된다. 시래기는 부드러움이라는 단어와 잘 조합되어야 제맛을 즐길 수 있다.

싱싱한 무에서 나온 무청을 말린 것이 좋은 시래기다. 3개월 정도 영하의 날씨에 말려놓은 시래기는 매력적인 음식이다. 데쳐서 냉동 보관하거나 그늘에 말려 서늘하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한다. 원산지는 코오 커서스 남부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으로 그 종류가 매우 많고 전 세계적으로 재배된다.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즐겨 먹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다. 무에 많이 들어 있는 식이섬유소는 위와 장에 머물며 포만감을 주어 비만을 예방하고 당의 농도가 높아지는 것을 예방한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 좋고, 칼슘 및 식이섬유소가 함유돼 있어 혈중 콜레스테롤을 떨어뜨려 동맥경화 억제 효과가 있다. 이 집의 시래기는 푸른 빛깔이 너무 좋다.


널찍한 김에 양념이 된 뽀얀 명태살을 올리고 거기에 매운맛을 중화시키는 콩나물을 얹어 한입 먹는다. 부드러운 시래기 질감이 입안 전체에 퍼지면서 명태살과 잘 어우러진다. 매콤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그마저도 콩나물이 꾹꾹 누른다. 그 맛이 가시기 전에 미역국을 한 모금 먹는다. 바닷속에서 한가로이 쉬면서 지내던 미역과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명태를 한꺼번에 구경한다. 헤엄을 치지 못하는 나는 바닷속에 들어갈 일이 없다. 그렇지만 마음껏 바닷속을 상상하며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이 순간은 바다를 잘 몰라도 그만이다.


채소를 생으로 먹을 때보다 익혀서 먹으면 훨씬 소화흡수가 잘된다. 으뜸은 햇볕에 말려서 먹는 것이다. 녹황색 채소에 포함되어 있는 베타카로틴을 비롯한 영성분을 가장 잘 흡수할 수 있는 음식이다. 약과 음식이 같은 뿌리라는 점에서 시래기는 음식이기도 하고 몸에 좋은 약이기도 하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취지에 부합하는 음식 탐험 여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 무 예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