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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Feb 18. 2021

설 명절에 전을 부치며

늘 명절 전날 전을 부칠 때 나는 맏아들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머님과 아버님의 묵시적 보호 아래 밀가루 반죽과 기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누렸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게으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굳어져버렸다. 내가 비어있는 자리는 온전히 둘째 동생과 막냇동생 몫이었다. 동생들이 잔소리하려고 하면 어머님께서 중재해주셨다. 그 덕에 명절 때면 늘 빈둥거리는 얄미운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코로나로 인해 동생들이 오지 못하게 되자 전을 부치게 되었다.


이번 설에도 예외 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아내에게 혼쭐이 나고 말았다. 젖은 동태와 동그랑땡을  밀가루 반죽에 넣었기 때문이다. 동태전과 동그랑땡은 계란옷을 입혀야 했었다. 배추전은 배추의 줄기 결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르기도 하고 밀가루 반죽을 어느 정도 입혀야 할 것인지 그리고 기름은 어느 정도 양을 둘러야 하는지 모든 게 생소했다. 작년 추석 때 했는데 몽땅 잊어버리고 말았다. 실험 삼아해 봤던 것들은 얼른 먹어치웠는데 맛도 별로 없었다.


배춧잎은 수분을 적당히 머금고 있어서 힘차게 위로 뻗어있다. 줄기는 단단하고 잎도 싱싱했다. 그래서 전을 부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차츰 요령을 알게 되면서 배추를 밀가루 반죽에 적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배춧잎들을 밀가루 반죽통에 모두 밀어 넣고 하나씩 꺼내서 프라이팬에 올렸다. 기름을 적당히 두르지 않으니 텁텁하다. 너무 많이 사용해도 기름져서 좋지 않지만 적당량을 어느 시점에 투입할지를 저울질하면서 배추전을 부치는데 점점 그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아버님 제사상에 올릴 배추전 여섯 장을 완성했다. 문득 저 배추전에 막걸리를 기분 좋게 드시던 아버님 모습지금도 눈에 선하다. 왜 그런 사소한 행복을 만드는 표정을 사진에 담지 못했는지 후회와 죄송함이 밀려온다. 무뚝뚝하지만 여린 감성의 소유자, 나도 아버님의 감성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그 느낌을 안다. 자식이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그 사이 막내딸이 호박전과 동그랑땡을 부치고 있었다. 부치기가 무섭게 젓가락이 그리로 향한다. 다른 채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호박은 그 쓰임새가 눈부시다. 된장국과 모든 볶음 요리에 예외 없이 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국수나 수제비에도 잘 어울린다. 호박은 저칼로리 식품으로 풍부한 섬유소와 비타민, 미네랄이 함유되어있는 건강 식재료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며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수원 정자시장에서 두 팩에 5천 원을 주고 사온 동태살은 연하고 부드러워 자꾸 젓가락이 가지만 제사상에 올릴 것을 생각해서 모양이 안 좋은 것만 골라 먹었다. 역시 전은 부칠 때 먹어야 제맛이다.


올가을 추석에는 건강한 모습의 어머님과 동생들과 함께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 때도 전은 내가 부치리라. 좀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해본다. 그리고 태백집에 걸려있는 아버님의 사진을 모시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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