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끝자락에서 만난 시장

- 신기시장

by 새로나무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진행하는 보디빌딩 대회에 친한 선배가 출전하는데 가서 응원을 해야겠다는 아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아들이 운동을 하거나 대회를 보는 동안 주변 시장을 탐험하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다. 시장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거기서 물건 파는 사람들과 물건을 같이 들여다보며 그들이 그동안 살아왔을 세월들과 그 물건을 사 다쓰는 사람들이 받았을 위로를 생각하기만 해도 신난다. 그리고 일부러 끼니때에 맞춰가면 다양한 먹거리들, 예상치 못했던 먹거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설렌다.


인천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저쪽 서울지역과 반대쪽 서해안쪽을 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선명하다. 이런 맑은 날씨는 오랜만이다. 시계(視界)가 족히 20킬로미터 이상 되어 보인다. 만 10년 된 차를 처음 구입하고 처음 간 곳도 인천이었다. 오래되었지만 방금 세차를 해서 그런지 늘 새로워 보인다. 엔진 소리도 경쾌하다. 앞으로도 한 10년은 더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을 내려주자마자 시장을 검색했다. 옥련시장과 송도역전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옥련시장으로 갔다. 널찍하고 쾌적한 분위기였으나,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아 아쉬운 발길을 송도역전시장으로 향했다. 역시 비슷한 분위기였다. 한번 더 도전한 곳이 신기시장. 일단 주차할 곳을 찾아야할만큼 붐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마침 시장 입구에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행운을 잡았다. 고맙게도 일요일은 노상주차가 가능하다는 문구에 안심하고 시장을 향한다.



신기시장은 1970년대 문학산 언저리에서 농사짓던 아낙들이 푸성귀를 내다 팔다가 자연스레 형성된 골목형 시장이라고 한다. 1975년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니 꽤 오랜 세월을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지면서 지내왔다. 신기 통보는 신기시장 내 화폐 대신 사용하는 구릿빛 엽전이다. 조선시대 상평통보를 본떠 만든 전통시장 상품권이라고 한다. 문화는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자색고구마, 쑥, 호박을 재료로 한 술빵을 보자마자 아내가 아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가는 길에 사기로 했다. 전체적인 구조와 시장 분위기는 인천 용현시장과 흡사하다. 먹을거리들이 즐비하다. 갑자기 출출해진다. 우선 시장을 전체적으로 탐색하고 나서 물건을 사거나 먹기로 했다. 한 바퀴 돌 무렵 <남부종합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곳은 시장이 두 군데가 겹쳐있나 보다. 기능적으로 서로 역할분담을 하고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남부종합시장은 해산물 가게가 많았다.

<홍두깨 손칼국수> 집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저녁 먹을 장소는 마음속으로 정했다. 그러고 보니 용현시장과 다른 시장에서도 홍두깨라는 간판을 본 기억이 난다. 밀가루 반죽을 밀어내는 도구로서의 홍두깨가 어느새 손칼국수집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한 바퀴 돌면서 적채가 눈에 띄어 들른 채소가게에서 저녁 무렵이 되어 떨이 상품들을 사게 되었다. 9천 원에 양손 가득 적채와 피망과 사과를 한 아름 들고 차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배가 조금 고프다.


다시 칼국수 가게로 향했다. 6시 30분이 넘은 시각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민 끝에 칼만두와 칼제비를 주문했다. 생각보다 오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먹을 음식의 맛을 돋운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약간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드디어 국물을 한 술 떠 맛본다. 시원한 맛이 단번에 멸치 베이스임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멸치만의 깔끔함 너머에 뭔가가 어른거리는 그런 맛이다. 경고문 구대로 양념장을 조금만 넣었다. 그리고 피페린이 들어간 후추를 뿌린다. 국물은 내가 디자인한 색깔로 변신한다. 가게 주인이 만든 음식이지만 일단 내 구역으로 들어온 이상 내 마음대로 디자인하고 내 마음대로 먹는다. 내 스타일대로 먹는 것이 음식을 만든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념장을 많이 안 넣길 잘했다. 국물 자체도 약간 얼큰한데 이 양념장이 그 얼큰함을 한 층 더 깊은 곳으로 안내한다. 더 깊은 곳은 겁난다. 다음날 고생할 생각에 더 이상 양념장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칼국수의 면발은 쫄깃하다는 느낌에서 두발 정도 더 나간듯한 맛이다. 면발을 손으로 빚으면서 거기에 어떤 에너지를 넣었는지 나는 그 상황을 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치아와 혀에 닿는 감촉을 통해 그 면발이 생성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끓는 과정에서 어떻게 익어갔을지를 촉감으로 느낀다.


그 노하우는 내가 알 길이 없지만 먹는 입장에서는 한없이 즐겁다. 리필한 국물 역시 남김없이 다 먹었다. 이를 지켜보던 주인들께서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신다. 아마도 문 앞 고객들의 반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늘 보던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잘 먹은 건 우리인데 너무 감사해하는 주인들의 모습에서 음식 너머의 세계에 와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만든 가치의 세계에서 나는 맛과 가치를 동시에 느낀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빵 터졌다. "어차피 인생은, 거기서 고기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면서 산다. 단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그런 묵묵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정성과 인심이 가득한 곳이다. 그 에너지는 다시 내가 일상을 살아내는 힘이 된다.


현금이 육천원 남았다. 술빵을 파시는 사장님께 여쭈어본다. 카드도 되냐고 ? 왜냐하면 한덩어리만 사려고 생각했는데 자색고구마빛 술빵, 쑥이 들어간 술빵, 호박 술빵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근을 한바구니 사고 옥수수를 두자루 샀다.


보디빌딩대회는 예상보다 시간이 지연된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잔 뽑고 방금 사온 옥수수를 먹는다. 칼국수 배와 옥수수 배는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근래 이렇게 맛난 옥수수는 처음이다. 찰지고 부드러운 질감에 넘어가 그만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아들과 올라오는 차안에서 술빵은 맛만 보았다.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운 질감과 은은한 고구마 향이 차안을 가득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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