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위의 우주여행자> - 크리스틴 라센
1988년 2학년 때 고학년 선배들이 들을 법한 <형이상학>이라는 수업을 수강했다.
한마디로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한 학기 수업을 듣는다고
뭔가 큰 울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호기심에 수강했는데 역시 내용이 어려웠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각자 주제 발표를 하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선택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무슨 발표를 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교수님께서 꽤나 흥미 있는 주제였다고 말씀하셨다는 기억과 함께
시공간의 특이점과 블랙홀, 그리고 우주의 팽창, 우주의 축소와
음수의 시간에 관한 키워드만이 겨우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시간의 역사>는 어마어마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근본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었다.
'사건의 지평선', 그리고 최근에 그 실제 사진으로 보게 된 '블랙홀',
시공간의 특이점, 우주의 팽창과 축소는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광활한 우주와 나의 존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아니면 아무 상관도 없는가?
형이상학 수업을 진행하신 교수님께서 어느 날 수업 시작하기 직전에 강의실에 다급히 오셨다.
이십 대의 아드임께서 안타깝게도 저녁에 멀쩡히 잠자리에 들었는데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셨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자신의 할 일을 지키기 위해 오셨던 교수님의 초연한 태도에 놀랐다.
오늘은 수업을 못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사는 동안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생각해봐야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여기 왜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시간의 역사>가 던지는 메시지의 높고 낮음을 벗어나
우주에서의 시간과 공간과 나의 운명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즈음
스티븐 호킹의 인간적인 면모와 살아생전의 고통스러운 자신의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의 단면을
아주 조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을 통해 발견했다.
나는 장애인 과학자가 아니다.
과학자이지만 우연히 장애를 지닌 사람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아주 자유롭게 우주 전체를 탐험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과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또 최대의 실패는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계속 대화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가장 막강한 적은 무지가 아닙니다.
가장 막강한 적은 지식에 대한 환상입니다.
나의 목표는 간단합니다.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있는 그대로인지, 그리고 도대체 왜 존재하는 지를 말입니다.
육체적 장애는 어떤 제약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의 장애가 제약이 될 뿐입니다.
내가 불구라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사람은 싫든 좋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언제나 화를 내고 불만을 토로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 시간을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낙오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언제나 당신이 할 일이 있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계속되는 한 희망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우리의 시야를 무한한 우주로 넓혀놓은 그의 업적 덕분에 나는 블랙홀과 시간의 특이점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여준 블랙홀이 실제로 촬영한 블랙홀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장면의 근원에는 호킹의 선도적인 생각과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희망보다 설득력이 있고 강하게 와닿는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신체조건 속에서도 그는 단단하게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겪었을 남모르는 고통과 절망 이전에 그가 말한 희망이란 단어 안에서 고개가 숙여진다. 지식에 대한 환상은 실제로 현실에서는 지식에 대한 이용가치와 그에 상응하는 기대로 나타난다. 그런 환상은 현실에서 수많은 악행들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왜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지를 조금은 알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기대치를 사회에 요구하고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좀 더 겸손하고 서로 양보해야 사회가 원만하게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말한 희망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손톱만큼이라도 조금 더 가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