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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Aug 19. 2021

지난 추억과 지금 만든 추억 - 포차

#1. 객지로 고등학교를 갔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10시에는 항상 허기가 밀려왔다. 

그 허기는 밥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보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그리움이었다. 

매일매일 인내하며 책을 보는 것도 허기지게 만든다. 

뭔가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느끼는 허기.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권하는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취했다. 

알딸딸한 기분의 여운은 그 허기들을 잠시 잠깐 잊게 해 주었다. 

그 뒤로 한 달에 한두 번 혼자 포장마차를 다녔다. 

소주잔에 값싼 안주 혹은 가락국수를 주문하고 먹으면 

잠시 잠깐이지만 딴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언젠가 엄격한 강의 스타일로 학생들에게 <핏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수학선생님을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빙긋 웃으시면서 소주 한 잔을 따라 주셨다. 

고등학교 내내 차갑던 그 선생님의 찰나의 따뜻한 미소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2. 대학 합격 소식을 제일 먼저 챙겨주신 분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에서 담임 선생님과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서 각종 모의고사 성적과 

내신 성적을 거의 실시간으로 체크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커닝한 사건을 일으킨 시점은 바로 그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새로 오신 세계사 선생님은 문제를 너무 어렵게 내셨다. 

어수룩한 생물 선생님을 넘어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마침 전근 오신 담임 선생님은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나의 커닝 소식에 실망하셨나 보다. 

다른 커닝 범들은 엉덩이 스무 대만 때리고 들여보내셨다. 

그리고 시계를 푸시더니 무려 70대를 때리셨다.

손바닥과 발바닥, 허벅지와 엉덩이 등등. 겨우 기어서 집에 갔다.  

아! 70대의 매! 그 매가 나를 바른 길로 데려다 줬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군에서 폭탄처리반에 배정되어 팔 힘을 엄청 기르셨다고 고백했었더랬다. 

그 폭탄 처리에 사용하시던 근육으로 나를 엄하게 체벌하셨다.  

그 뒤로 나는 커닝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겨울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 들리는 포장마차에서 선생님과 만났다. 

합격 축하의 뜻으로 소주를 두 병 주문하셨다. 

그리곤 서로 팔을 걸고 원샷을 했다. 

소주 맛은 쓰면서도 달디달았다. 

추억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느낌이었던가?

선생님은 대학시절 얘기를 해주셨다. 

내가 진학한 바로 그 대학 그 학과를 다니시다가 

딱 한번 시위에 참여하신 뒤 퇴학조치를 당했다고 하셨다. 

그 뒤로 교대에 진학하셔서 선생님이 되셨단다. 

엄혹한 세월의 흔적을 선생님의 미소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깊은 배려심과 포장마차의 아늑함속에 겨울 찬바람은 스르르 녹아내렸다.  

지금도 가끔 생각만 하고 감히 전화를 드리지 못한다. 

연락드린 지 너무 오래되어 죄송스럽다. 


#3. 대학 졸업 무렵 학사논문의 주제는 <니체>였다. 

대충 써서 제출해도 누가 심사하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나는 니체 책을 두 달 동안 끼고 살았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피안>, <비극의 탄생>....

도대체 그 내용들을 제대로 알고 읽기나 했는지 아니면 

니체라는 이름에 경도되고 취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매일 저녁 개천옆 포장마차로 출근했다. 그날 읽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뭔가 대단히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 청승을 떨 때 포장마차의 

가벼운 메뉴와 소주는 나를 힘껏 껴안아주었다.

고독으로 변장한 시간들이었지만 금세 지나가고 

두 달이 거의 다 될 무렵 이러다가 폐인이 될까 싶어 포장마차로의 출근을 그만두었다. 


#4. 어느 사이엔가 포장마차보다는 포차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이동수단으로 영화에 흔히 등장하기도 했던 포장마차가 

어떻게 한국에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허기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너무 흔하게 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접했기에 

그 장소가 가진 익숙함은 친근하다.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도 서로 바쁘고 관심사가 달라 한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와

요즘 자주 만난다. 어느 사이엔가 20여 년이 훌쩍 지나버리고 나니

지나간 시간의 아쉬움을 곱씹기보다는 가까이 있을 때 더 알차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남의 장소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개업한 포차.

헐 이 코로나 시국, 더구나 델타 변이가 점차 확산되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이 시점에 포차를 개업한다는 대단한 배짱과 음식 솜씨가 궁금했다. 


낮술은 감미롭다. 두 세잔을 마실 무렵 첫 안주가 등장한다.

골뱅이 무침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이 접해온 메뉴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쉽지 않다. 

잘해야 본전인 안주다. 

내용 구성도 중요하지만 면사리를 어떻게 삶아내고 

그 촉촉하고 쫄깃한 식감을 오랫동안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다. 

양념은 자극적이지 않고 면사리와 뒤섞여서도 재빨리 희석되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안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골뱅이 무침이 자리를 지키는 동안 대화와 취기는 무르익고 오른다. 

새로운 아지트를 발견했을 때의 은밀한 성취감이 밀려온다. 

쫀득하게 데친 신선한 문어의 향기가 안개처럼 가게 안에 흩어지며

기분 좋게 취기를 끌어올린다.  

지난 추억과 지금 만들어낸 추억이 포차 안에서 버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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