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끓이며

by 새로나무

지난밤 수고하고 애썼던, 그래서 쓰린 속을 위로해줄 차를 끓인다. 볶은 옥수수, 결명자, 현미, 블랙 보리, 아기 보리, 메밀을 5리터 주전자에 넣고 끓인다. 끓는 찻물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 알갱이들이 후각을 자극한다.


향긋한 내음 속에서 이 곡식들이 자랐던 대지 깊은 곳의 흙 기운과 들판을 상상한다. 그곳으로부터 여기 내가 서있는 부엌까지 직선을 그어본다.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는 따뜻한 손길을 상상한다.

거두어들인 곡식들은 자루에 담겨 짧은 여행을 한다.

그리고 곡식들은 차례로 뜨거운 그릇 속에서 볶아진다.

한 차례 화학적 변화를 거친 곡식들을 봉지에 담는 손길을 상상한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긴 여행 끝에 우리 집 현관 앞에 살며시 놓는 손길을 상상한다.


마침내 나와 만난 이 곡식들이 이 아침 나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끓고 있다. 나의 세포처럼 저 곡식 알갱이들이 끓는 물속에서 어떤 미세한 변화를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끓는 물속에서 곡식들은 그동안 쌓아두었던 기운을 나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것을 단지 그동안의 경험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점점 더 짙은 색을 띠며 각각의 알갱이들이 대지의 기운을 풀어놓는다.


그 뜨겁게 끓는 물을 바라보며 나도 매일매일 저렇게 끓어오르며 세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기운을 꺼내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다가 다시 아무 생각 없는 가운데 수증기의 냄새를 맡는다. 방금 전보다 더 구수한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온다. 평화로운 안식의 시간을 조용히 즐기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컵에 담긴 차의 깊은 속으로 몸이 조금씩 기분 좋게 밀려들어간다. 내 몸은 조금씩 진정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한 마음이 밀려들어온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내 마음은 아무 걱정도 느끼지 않고 오직 차와 아늑한 대화를 나눈다.


나도 이런 고마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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