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나무 Sep 06. 2021

가을 초입의맛 - 모두부

희뿌옇게 맑고 고소한 세계

뜨겁던 여름날이 지나고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낮 26도의 온도라 해도 덥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주변 환경의 섬세한 변화를 체감하는 내 몸은 영리하게도

숫자의 영향을 덜 받는다. 반대로 무덥던 여름날에는 37도라는 숫자보다

더 많이 스스로 영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생각보다 견디는 힘은 약한 대신

상황이 좋아지면 그 상황을 더 즐기는 편이다.

약간은 얇은 그런 내가 좋다. 적당히 얇아서 좋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신비롭고 멋진 일이다.

같은 조직 내에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사이이지만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이심전심 통하는 대화를 통해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다. 위로를 주고받고 일상의 삶을 주고받는 동안은 지난 시간 조직 안에서 생겼던 작은 상처나 사소한 감정들을 훌훌 털어내게 된다.

힐링이 되는 한편 갑자기 대범한 한 인간으로 변모하는 나 자신을 저 위로 올라가 헬리콥터 조망으로 내려다보게 된다.

대범한 한 인간으로 껄껄 웃고 있는 멋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감사한 일이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두부가 가진 매력, 두부가 준 영향에 가장 깊이 관여한 분은 돌아가신 아버님이다. 20여 년을 아버님은 두부공장을 다른 네 분과 공동으로 운영하셨다.  


콩물은 물컹하고 간이 별로 되어 있지 않아

콩의 비릿한 냄새와 맛이 그대로 느껴져 처음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차츰 적응되어 가며 점점 더 맑고 고소한 세계로 들어갔다. 하루는 아버님께 갔더니 증기 자욱한 공장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 두시고 계셨다.

자세히 보니 콩물에 라면을 끓이신 거다.

그 뒤로 콩물 한주전자 집으로 가져와 나도 라면을 끓여 보았다. 아 역시 가열을 하니 콩의 고소한 맛이 훨씬 먹기 편안했다. 국물도 아주 고소하고 시원했다. 라면에 포함된 MSG가 해로운지 아닌지 논란 차체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라면 특유의 자극적인 국물 맛이 콩물에 의해 중화되었다.


두부는 제조과정과 물에 담그는 과정 및 배달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파손되는 두부가 나오게 마련이다.

어머님이 해주시는 두부조림은 특히 맛있었다.

고춧가루와 대파를 썰어 넣고 간장을 적당량 뿌리면

두부에 간이 배고 약간은 매운 두부조림을 먹을 수 있었다.

두 동생이 별로 많이 먹지 않아 두부조림 중 반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러니 서둘러 먹을 필요도 없고, 부드럽고 고소하고 뒷맛이 개운한 두부는 그렇게 평생의 동반자로 내 장이 기억하는 음식이 되었다.


옅은 콩국물은 마치 메밀막국수 가게에서 내어주는 메밀차처럼 후루룩 마실 수 있는데 고소하고 맑은 콩국물의 맛이 살아있다. 한 그릇 더 달라고 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일행 중 한 분에게만 더 주시면서 콩값이 비싸서 더 드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모두부를 사전에 찾아보니 두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갓 만든 모두부는 다른 양념 없이 먹어도 고소한 맛이 난다고 쓰여있다.

음식을 그냥 먹기만 하다가 이렇게 사전을 통해 음식의 발생 경로와 기본적인 개념 그리고 효능까지 읽어가면서 음식과 더 깊이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아는 만큼 더 맛을 깊게 느끼게 된다. 모두부 역시 맑고 고소한 맛이고 볶은 김치의 아기자기한 자극적인 맛과 아주 잘 어울린다.

모두부를 둘러싼 콩국물은 앞서의 콩국보다 약간은 진하다.

청국장은 3일 정도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아 이 청국장에서는 오랜 기간 숙성된듯한 진한 향기가

냄비 곳곳에 배어 있어서 한동안 그 향기에 취한 채 밥을 먹는다.

가을의 초입은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책이 눈에 잘 들어와 점점 나는 익어가고

곡식과 과일들 역시 풍성하게 익어가고

저 푸른 하늘과 맑은 구름이 늘 나를 내리 비친다.

자연과 호흡하기 적당한 이 계절에

모두부와 희뿌연 콩국물 속에 깊이 새겨진 맑은 맛을 되새겨본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유의 해장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