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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Sep 03. 2021

치유의 해장국

채움과 비움

속이 쓰려 눈을 떴다. 아랫배 쪽인데 생각보다 그 쓰림이 심하다. 통증은 간헐적으로 밀어닥쳤다. 아무래도 딸아이 취업 축하를 너무 심하게 했나 보다.


2016년 크리스마스날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패혈증 쇼크로

생사를 넘나들던 그 아이가 인공지능 언어를 습득하고

개발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는 그 두 가지 이유로 아주 과하게 달렸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급하게 따뜻한 차를 끓여 먹었다.

따뜻한 기운이 감싸며 속은 안정되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다가오는 근본적인 속 쓰림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생존본능으로 집 근처 해장국을 검색했다.

뭔가 단단한 내공을 쌓아온 가게를 발견했다.

웹에 있는 정보들은 웹이라는 가상공간에 떠있는 정보다.

그 정보가 내 몸속으로 들어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안도할 수 있으리라.


술 먹은 다음날 해장국을 찾기 시작한 시점은 아득하다.

대입학력고사 끝나고 며칠 뒤 친구들과 해방감을 소주에 버무려 먹었다.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 때 마음씨 좋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끓여주신 국이 나를 살렸던 기억이 난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술을 즐기기 시작했으므로 대략 그 시점 어디선가 출발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해장국이 주는 효능감은 경험적으로 축적해왔다. 학교 다닐 때는 동태탕이나 순두부, 닭곰탕에 많이 의지했다.

원래 육류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선지 해장국은 선입견이 있어서 잘 먹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하는 곳을 처음부터 만났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동의보감(조선시대 허준 선생,) 본초강목(명나라 이서진), 방약합편(조선 말기 황필수)에 의하면

양은 정력과 기운을 돋우고 비장과 위를 튼튼히 해주며, 오장을 보호하고 어지러움을 다스리며

소갈증을 멎게 한다. 당뇨, 술중독, 몸의 독성 해소, 장내 해독 살균, 이뇨, 피부미용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선지는 철분햠량이 높고 단백질, 무기질, 펙틴 등 다양한 영양소가 많아

소화기계와 빈혈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4시 넘어 가게에 오니 아무도 없어서 한적했다.

쓰린 속을 생각하면 여느 가게처럼 당장이라도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걸 보면 제대로 끓여서 나오는가 보다 짐작만 할 뿐이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무료하고 시장기 가득할 때는 인내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음식이 어떤 효과가 있다고 해도 맛이 없으면 먹지 않게 된다.

아무리 맛있어도 몸에 미치는 효과가 낮으면 그 또한 쉽게 찾지 않게 된다.

그 효능과 효과를 맹신해도 안 되겠지만

아무런 효능과 효과가 없다면 일상에 힘이 되는 음식에 들기 어려우리라.

요즘처럼 힘든 상황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신 모든 사장님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까다로운 사람들의 입맛을 챙기는 당신들에게 큰 복이 있기를 빕니다.


소스 맛있게 만드는 법에 따라 소스도 만들어 놓았다.

절인 고추를 채 썰어놓은 모양이 제법 이쁘다. 보통 칼국수 집에서 절인 고추를 내놓는 데

특이한 조합이다. 처음에 주신 소스에 들깨와 고추절임과 고추기름을 적당량 섞었다.

들깨와 후추를 뿌리고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내 몸은 안도했다.

해장국 국물 안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실한 믿음.

순간 김훈 선생의 글이 생각났다.

<백성들의 국물은 깊고 따스했다> - 칼의 노래

양과 선지를 조금씩 만든 소스에 찍어 먹었다.

아 이렇게 속이 쓰린 순간에도 맛을 음미하고 있을 줄이야

국과 밥을 먹는 물리적 현상은 몸안에서 화학적인 변화를 촉진했다.

해장국을 먹으며 몸은 서서히 음식에 대해 반응했다.

땀이 나면서 속이 조금씩 조금씩 미세하게 풀어지고 있다.

아 이 미세한 느낌은 마치 허리 통증이 깊어지다가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풀어지는 느낌과 닮아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해장국을 2/3쯤 비울 무렵 국물을 더 주실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여쭈어본다.

넉넉한 인심을 담아 정성스럽게 끓인 국물을 다시 주신다.

소스를 국물에 섞어 먹는다.

만드는 것은 주인의 영역이지만 먹는 것은 나의 영역이다.

마음껏 해석하고 마음껏 음미하고 마음껏 즐긴다.


뭔가 또 다른 새로운 맛과 더불어 몸이 치유되는 느낌을 즐겼다.

채우고 비우고 느끼고 다시 채우고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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