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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05. 2021

겨우살이 벗 십 일 곡차

섞이고 익어가며 향기 나는 것에 관하여

볶은 곡식으로 끓인 차에서 나는 향기는 허브차와 달리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과 수확하는 농부의 땀을 떠올리게 한다. 볶은 통메밀, 통메밀껍질, 흑미, 통팥, 현미, 율무, 옥수수, 수수, 블랙 보리, 아기 보리, 결명자까지 모두 열한가 지다. 그래서 작명을 해봤다. 십 일 곡차. 


따뜻한 햇살이 사선으로 내리비치는 거실에 차의 향기가 가득하다. 십 일 곡차의 향기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삶의 의미를 쫓다 보면 내가 어느 점에서 성숙해지고 어느 점에서 모자란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차의 향기는 그런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말을 건다. 지금 여기 짙게 퍼지는 차의 향기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안식을 취할 것을 주문한다. 


완전히 끓는점까지 도달한 상태 그대로 두면 끓어서 넘치고 너무 세게 가열하면 차의 은은한 맛을 음미하기 어렵다. 불을 낮춘 상태에서 10여분을 더 끓인다. 색깔은 점점 짙어진다. 곡식들끼리 어울려 새로운 맛을 내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곡식의 향기와 대화를 나누는 나는 아늑한 기분이 든다. 구수한 그 향기와 맛. 


이번에는 말린 무와 말린 도라지, 말린 우엉을 조금씩 넣어 다시 한 주전자 끓인다. 곡식들의 맑은 맛 외곽에서 두툼하게 감싸는 무의 향기, 도라지와 우엉의 향기도 조금씩 섞인다. 좀 더 짙은 색깔의 차 향기가 또 한 번 거실 가득히 퍼져나간다. 


어머님께서 어렸을 적부터 자주 말씀하신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기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향기가 그리워서 다가오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차를 한잔 마시면서 깊은 향기를 간직한 채 선한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주위에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게 지금 삶의 의미와 목표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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