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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Jan 22. 2022

제철 남도 음식

오랫동안 만나던 후배님들의 초청으로 성수동을 향한다. 찬바람이 쌀쌀하지만 아들로부터 살짝 빌려 입은 파커가 있어서 추위가 몸안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눈 내린 거리는 살얼음이 살짝 얼어서 걷는데 신경이 많이 쓰인다. 어느덧 1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맑은 미소들은 여전하지만, 세월이 지나간 흔적들은 각자 가져갈 수밖에 없나 보다. 잊지 않고 연락하는 감사한 마음을 안고 음식점으로 향한다. 


2008년부터 어르신을 따라 남도 출장을 자주 다녔다. 전복의 완도, 한우의 고장 장흥, 세발낙지와 몽탄 막걸리를 떠올리는 무안과 주꾸미 샤부샤부의 인상이 강렬했던 광주, 다양한 해산물들을 맛본 군산, 도곡 막걸리의 도곡, 강진, 구례에서 나는 남도 음식의 진수를 맛보았다. 어느 가게를 가건 대부분 맛집이었다. 젓갈과 김치는 그 수준이 일정해서 어디를 가건 기대하게 되는 맛들이 널려 있었다. 제철 남도 음식을 서울에서 만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일상 속 풍경들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희미하지만, 신경을 써서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법이다. 두세 번 들렀을 때만 해도 큰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오늘 제대로 이 가게를 탐험한다. 자리가 거의 차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음식을 음미하는 일은 늘 설레게 한다. 또한 이렇게 기존에 다녔던 곳의 가치를 깨닫고 재발견하는 일 역시 설레고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내 안의 보물들은 어디 먼 데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1. 갑오징어 숙회


데친다는 표현은 푹 익히는 것과 날 것의 어느 가운데 저울추가 있어 그 지점이 될 터이다. 데치는 정도와 온도는 식재료를 다루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온도계와 시계를 들고 정확히 측졍해가면서 데칠 수도 있을 것이나, 나는 왠지 그냥 요리하는 사람의 감각과 그동안 쌓여온 경험으로 데치리라 생각한다. 정확한 균형점은 식탁 위에서 먹는 사람의 만족도에 따르게 될 터이다. 적당히 데쳤다는 표현이 잘 어울릴 만큼 갑오징어의 식감은 부드럽고 쫀득하다. 


씹을수록 오징어 안의 육즙들이 입안 전체에 퍼진다. 묵은지와 양념된 파채는 오징어의 식감을 잘 느낄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막걸리를 부르는 맛이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던 후배님들 모두 막걸리 대열에 합류한다. 식탁 위에서의 사소한 경쟁에서 이긴 것 같은 얕은 우쭐한 마음이 밀려온다. 그동안 먹었던 갑오징어에 관한 추억들을 혼자 슬며시 꺼내본다. 일동네 근처의 가게에서 재작년 여름에 먹었던 부드러운 식감의 갑오징어, 전남 어느 논두렁 사이의 가게에서 먹물을 잔뜩 입가에 묻히며 먹던 갑오징어 숙회. 


음식은 아련한 추억들을 계속 재생해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나를 빌어 추억을 소환한다. 음식을 먹는 것은 일종의 게임과 같다. 추억 새로 만들고 재생하기 게임. 

#2. 급속 냉동 삼치회


지금쯤 제주도와 남도의 음식점에서는 생물 삼치회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을 것이다. 뜻밖의 삼치회는 급속 냉동을 해서 생물 삼치 회의 신선한 맛과 느낌을 어느 정도 살려놓았다. 양파와 마늘과 고추와 버무린 소스는 삼치 회의 맛을 잔뜩 끌어올린다. 비릿한 맛 일도 없는 부드러운 삼치회를 김에 싸서 먹는다. 묵은지에 담긴 주인장의 솜씨가 김에 싼 삼치와 너무 잘 어울린다. 묵은지 자체도 맛있었지만, 양념을 벗겨낸 백김치 형태의 묵은지는 오히려 그 묵힌 맛을 더 깊이 느끼게 해 줘서 삼치의 아삭한 식감과 잘 어울렸다.

#3. 속풀이 대구탕까지


막걸리의 탁한 빛깔은 오묘하다. 탁함속에서 맑음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묵혀왔던 감정의 찌꺼기들과 잡생각들과 사소한 욕심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효과가 숨어있다. 내가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9시로 제한된 영업시간이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이른 귀갓길을 재촉해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역시 마무리는 탕이다. 시원한 대구탕으로 속을 푸니 한잔 더 먹고 싶어 진다. 후배님들도 덩달아한 병 더를 외친다. 결국 9시를 꽉 채우고 길을 나선다. 


후배님들과 다음에는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나자고 주먹을 살짝 부딪치며 헤어진다. 

막걸리 몇 잔으로 몸은 이미 녹아있고 몸안에 퍼진 남도 음식의 향기가 추위를 잊게 해 준다. 

사람들이 꽤나 많이 귀갓길을 재촉한다. 

한 10시 정도만 제한을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담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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