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잔대학과 레만호
취리히에서 로잔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로잔 연방 공과대학 방문은 처음이지만 인접한 레만호는 귀에 익다. 1979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영하와 정애리가 주연한 <레만호에 지다>라는 드라마에서 이미 그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을 보았었다. 두 배우 모두 한창 젊고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어서 레만호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더 애잔했었다. 로잔공대 기술사업화 관계자와 미팅을 한 후 학교 앞에서 10분 거리에 레만호 전경이 펼쳐진다.
그 호수길을 따라 걷는데 그저 풍경을 바라볼 뿐이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깝다. 광활하게 펼쳐진 호수를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간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레만호의 풍경에 몰입했다. 아마도 그 옛날 드라마에 등장한 곳이라 더욱 감상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정애리 배우가 촬영했던 장소라는 감상.
@2. 로잔 성당이 보이는 언덕 위 cafe de leveche lausanne
해외여행을 다니면 항상 하는 버릇이 있다. 무작정 그 도시를 걸어 다닌다. 사전에 걷는 코스 정도만 정보를 입수하고 나머지는 그날의 흐름에 맡겨둔다. 가다가 힘들면 잠시 쉬어가고 배고프면 잠시 멈춰 먹을 것을 먹고 다시 걷는다. 로잔 공대와 레만호에서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 시내라도 뭔가 특별한 장소를 가고 싶었다. 나와 같이 간 일행들과 함께 그렇게 해서 로잔 언덕까지 걸어올라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보니 이 언덕의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성당 주변에 가서 알게 되었다. 이곳이라면 뭔가 이정표가 될만한 식당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바로 그 로잔 성당이 보이는 식당이 눈에 띄었다.
cafe de leveche lausanne. 일단 가게 안에 들어가기 전 바깥 좌석이 너무 운치가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옆에 길의 흐름에 맞춰 계단식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내가 주문을 한다. "Do you have local draft beer?"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에서 나는 술을 마시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그 지역을 가면 그 지역 음식을 먹어야 그 지역의 느낌과 색깔, 그리고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지역 생맥주를 먹어야 그 지역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 아 그건 술을 먹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다.
생맥주는 시원하고, 진하고 고소한 뒷 맛이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을 주문하고 안주를 주문한다. 요리를 세 가지 정도 시킨 것 같은데 넷이 먹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양이었다. 맥주잔에 몸과 마음이 잠기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려 운치를 더해준다. 가끔은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의기투합이 되어 나선 여행에서 그 여행의 절정을 맞는듯한 시간에서는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 시간이 좀 더 더디게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지나온 시간 동안 우리가 같이 겪었던 일들이 테이블 위에 안주로 올라온다. 해외에 나가면 국내에서 겪었던 일들이 조금씩 작게 느껴진다. 벗어난 느낌 때문일 것이다.
@3. 귀가 길 열차에서 술이 확 깨다
취리히로 가는 길에 열차를 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가롭고 평화롭고 아늑하고 알딸딸한 기분에 취해 로잔에서의 직전 상황에 대한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화장실이 급한데 누가 들어갔는지 나오지 않는다. 한참 뒤에 다시 가서 문을 여는 순간 냄새가 확 밀려왔다. 냄새 폭탄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누군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변기 물을 내리지 않았다.
유럽에서 대형 버스를 타면 의자를 뒤로 젖히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변기 물을 내리는 방식도 각기 다르다. 변기를 내리는 곳을 찾는 동안 냄새 폭탄에 제압당했지만, 나 역시 소변이 급해서 필사적으로 찾았고 겨우 물을 내렸다. 볼일을 보는 동안 냄새 폭탄의 잔류 기체들이 여전히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방금 일어난 일을 얘기하는데 헐~~ 같이 간 일행 중 후배가 방금 큰 볼일을 봤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물 내리는 방법을 몰라 할 수 없이 얼른 나왔다고 한다. 아 이 원수를 혼낼 수도 없고 허허 웃고 말았는데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끔찍한 경험이 아주 생생하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로잔에서의 추억을 평생 안고 살게 되었다.
@4. Calanda 갈란다 !!
다음 날 취리히 대학에서의 공식 일정을 마친 저녁, 야간 기차를 타기 전에 취리히 역 근처의 식당을 하나 찍었다. 서로 너 나할 것 없이 Local Draft Beer부터 주문했다. 헐 ~~~~ 지역 생맥주 이름이 Calanda. 장난기가 발동했다. 칼란 다를 조금만 부드럽게 발음하니 갈란다. 우연인 사건을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바꿔놓는 장난. "그래 우리 네덜란드로 갈란다", "지금 갈란다"를 외치며 생맥주를 마셨다. 추억의 순간 하나를 밤하늘에 빛나는 별로 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