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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Mar 08. 2022

강풍에 지친 몸 녹이는 능이백숙

어제 볼 일이 있어 강변 테크노마트에 갔었다. 사전 투표를 위해 주변 동사무소를 찾는데 돌풍이 엄청나게 불었다. 몸 균형을 잃지 않으려 버텨야 할 정도로 굉장한 바람이었다. 얇게 옷을 입고 나섰는데 추위를 많이 느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도 낮고 여전히 강풍주의보가 있어서 옷을 좀 두껍게 입고 나섰는데 하루 종일 야외 활동을 하다 보니 몸이 완전히 지쳤다. 기온이 4도라고 하지만 체감은 영하 3-4도 정도 된다. 야외 활동하는데 손을 호호 부는 선배도 있을 정도로 힘든 하루를 보냈다. 평소 백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들 일행이 백숙을 먹자고 하니 그냥 심드렁한 기분으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새로운 가게에서 새로운 음식이나 기존에 맛보았던 메뉴를 먹으러 가는 것은 모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가게가 주는 인상은 아늑하고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별도의 방에 안내되어 조용한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밑반찬들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음식이 정갈하고 간이 세지 않으며, 달지 않고,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의 재료를 사용한 것처럼 자극적이지 않았다. 능이백숙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배가 조금씩 찼다.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음식 인심이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식재료를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내어주는 그 마음 한편에는 예산에 대한 걱정, 가게 운영에 대한 부담 뭐 이런 것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이 가게 역시 반찬 반찬 인심이 후하고 넉넉했다. 더덕 무침, 호박 무침, 고사리무침들도 아주 맛있었고, 무생채는 가벼운 양념과 좋은 무를 사용해서 싱싱하고 시원했다. 특이한 반찬은 우거지 나물이다. 우거지를 헷볕에 잘 말렸다가 가벼운 양념으로 무친 뒤 물기를 넣고 얼렸다가  살짝 녹여서 내놓았다. 빛깔이 아주 싱싱한 우거지는 차가운 상태임에도 아주 부드러웠다. 주인이 우거지를 아주 잘 다루는 전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 맛보는 차가운 부드러움이다. 




그냥 주시는 파전은 아삭 함대 신 촉촉한 촉감이 맛있었다. 여주 막걸리는 어떤 맛일까? 나는 단맛이 나는 막걸리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막걸리의 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주 막걸리의 단맛은 뭔가를 첨가한 단 맛이 아니라 우리가 어렸을 적 쌀을 누룩에 발효시켰을 때의 맛처럼 자연스러운 단맛이 난다. 막걸리의 부드러운 질감은 높여주고, 막걸리 특유의 비중 있는 묵직함은 덜어낸다. 친구가 밥그릇을 술잔으로 착각하여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받고 보니 술잔이 그 앞에 있었다. 술잔의 두 배 정도 되는 밥그릇에 찬 막걸리를 보니 비우고 싶은 충동이 인다. 다들 여주 막걸리가 맛있다고 한다. 


여주 쌀이 좋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모두 같은 방향으로 추정한다. 그러고 보니 이천이나 여주에서 먹었던 막걸리들은 다 맛있었다. 이천의 경우에는 이천쌀밥을 먹으러 가서 막걸리를 안주 삼아 먹었는데, 다양한 반찬들과 찰진 쌀밥은 막걸리와 잘 어울렸다. 안주 없이 먹는 막걸리는 온전하지 않다. 막걸리는 맛있는 음 음식과 잘 조화를 이룬다. 내 생각에 막걸리는 술이라기 생각보다는 음식에 가깝다. 




능이 능이백숙이 나왔다. 2시간 전에 주문을 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삼계탕 잘하는 곳도 백숙 잘하는 곳도 대개 1시간 전 주문하면 된다. 나온 음식을 보고 먹고 보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능이백숙의 재료가 토종닭이기 때문이다. 토종닭은 잘 요리하지 않으면, 입안에서 약간 저항하는 단단한 질감이 남기 때문에 잘 요리해야 한다. 물론 씹는데도 오래 걸리고, 몸에 흡수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닭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너무 잘 맞았다. 부드러운 육질의 질감 하나하나가 언 몸을 녹인다. 능이버섯이 닭과 잘 어우러지기는 했으나, 양이 생각보다 아쉬웠다. 대신 대추는 풍부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닭고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한 접시를 네 사람이 먹는데 양이 이미 꽉 찰 정도인데, 죽 한 냄비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백숙 죽도 맛있는 음식이지만, 밑바닥에 눌어붙은 죽 누룽가 최고다. 죽 누룽지는 보통 누룽지의 딱딱함보다 부드럽고 누룽지 특유의 고소함을 선사한다. 닭 육즙이 배어있는 누룽지는 훌륭한 술안주다. 안주 삼아 막걸리를 한잔 들이켜고 나니 온 몸이 노곤해진다. 찬 바람 기운들이 싹 씻겨 내려가고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훌륭한 음식은 약이다. 


얼마 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선배가 명예퇴직을 내고 학교를 그만두셨다. 정년을 3년 반 정도 남겨두고 퇴직하셨는데, 지난 2년 동안 철저히 퇴직 준비를 했었다. 퇴직하자마자 곧바로 새로운 직장에 취직하셨다고. 정년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제2의 직업을 준비하고 실행한 선배님의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선배님은 7년 남은 직장 생활을 어떻게 정리해야 될 것인지 아주 중요한 모멘텀을 나에게 제공해주었다.  첫 출근해서 일주일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얼굴을 보니, 밝고 활력 있는 에너지로 넘치신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은 기존에 했던 생각과 관성을 던져버려야 가능하다. 매일 혁신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삶이고 실천하고픈 삶이다. 선배님은 훌륭한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가게를 나서기 전에 주방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깨끗하고 정갈하며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고, 반찬을 내주는 곳과 음식을 하는 곳, 중간 조리를 하는 곳, 체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보기에 좋다. 먹고 나서 주방을 보니 내가 먹었던 음식에 대한 신뢰가 더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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