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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Mar 24. 2022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순간

여느 때처럼 저녁 수업을 듣기 전 식사를 하러 갔다. 다이어트에 관한 강박관념이 밥과 고기를 좀 더 먼 거리에서 보도록 이성적으로 계획하여, 곰탕의 국물과 무생채만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계란 장조림이 옅은 빝깔이어서  짜지 않아 보였고 샛노란 노른자가 젓가락을 유혹했다. 잘 삶은 계란에 장조림의 은은한 간이 배어서 맛있었다. 곰탕의 국물을 뜨는데 숟가락에 와닿는 수육의 질감이 부드럽다. 한 입 먹어보았다. 평소 수육을 별로 즐겨하지 않는 이유는 부드러운 수육을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질감이 일단 굳어있으면 씹는데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면 온전히 수육의 맛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저항감이 큰 수육은 씹어 넘기는데 상당한 애를 먹는다. 아마도 과거 그런 경험이 소고기 수육을 선호하지 않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드러운 수육 앞에 애초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모든 계획과 약속은 변경하기 위해 하는 것인가라는 허망한 생각을 뒤로하고 수육의 맛을 조금씩 깊이 음미한다. 

이번에는 먹을 생각 없었던 접시에 담긴 수육으로 손이 간다. 부추에 말아 소스에 찍어 먹는다. 곰탕 국물 안에 잠겨있던 수육과 같은 부드러운 맛이다. 그 순간 평상시 같으면 외면하고 먹지 않을 법한 오징어 젓갈이 눈에 띄었다. 시각을 자극하는 선명한 붉은 양념의 오징어 젓갈과 수육을 같이 먹으면 어떤 맛일까? 보통의 오징어 젓갈처럼 비린내가 나거나 짠내가 나지 않았기에 이 시도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수육에 젓갈 한 점을 올려놓으니 수육의 빛깔과 젓갈의 빛깔이 잘 어울려 보기에도 좋다. 바다와 육지의 선수들이 내 입안에서 만났다. 수육은 부드럽게 오징어는 찰지게 서로 서서히 엉키고 마침내 입안에서 융합되어 녹는다. 수육의 싱겁고 담백한 맛과 젓갈의 은근하면서도 자극적인 맛에 더해 감칠맛이 뒤섞이며 잠시 동안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침 다른 분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간 뒤늦은 시간이어서 넓은 홀에 나 혼자 있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이 몰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박구용 교수의 <늙어가는 존재의 미학>에서 그는 사는 동안 몰입하여 시간을 잊는 사건을 경험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추후 수정 요망) 바로 거기에 부합하는 순간이 지금이다. 넓은 공간 안에서 나는 새로운 맛을 창조해냈다. 이번에는 곰탕에 있는 수육에 오징어 젓갈을 올려놓는다. 소스와 파채도 같이 올려놓았다. 보기에 좋다. 역시 맛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식 하나안에서 새로운 작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잠시 안온한 기분을 느낀다. 시원한 곰탕국물은 덤이고, 이 맛을 창조하는데 응원의 메시지를 무생채가 보낸다.


음식을 만드는 영역과 음식을 먹는 영역은 모두 예술의 영역이다. 식재료들이 자랐을 대지와 바람과 비와 자양분은 자연에 포함된다. 생명이 자라는데 태양과 지구의 생태계는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가득 평온함이 밀려온다. 식재료를 옮기는 손길들은 행여 상하지 않을까 과학의 힘과 기술의 힘을 이용해 최선을 다한다. 드디어 식재료는 요리사의 손에 맡겨진다.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동원해서 최선을 다한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결과가 오늘 지금 여기에 있다. 


박구용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로 왔다. 그때 거기를 상상하고 지금 여기를 맛본다. 음식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식재료가 자라는 그때 거기, 식재료가 자라는 그때 거기, 식재료를 요리하는 그때 거기를 지금 여기에서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먹을 것인지 생각하며 먹는다. 어떻게에 대한 답으로 나는 오징어젓갈과 수육의 융합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몰입의 순간, 시간과 공간의 느낌을 잠시 잊는 순간을 만들어냈고 나의 미각 수용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의도의 부합 여부와 상관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색다른 맛을 창조하고 그 맛을 즐기는 이 순간을 만든 사람도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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