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때 선배님들 따라 직장 근처 용두동 주꾸미를 처음 먹었을 때, 주꾸미 맛이 너무 매워 정신없이 콩나물과 생선 구이를 찾았었다. 매운맛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또 한편으로는 요령이 생겨 매운 양념을 물에 희석시켜 먹었었다. 2002년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 태백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같이 먹으라고 선배님께서 주꾸미 5인분을 포장해 선물해 주셨다. 그 선물은 지금껏 받은 선물 중 최고였다. 부모님과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면서 막걸리와 곁들여 먹을 때 주꾸미는 매운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 후로 용두동에 주꾸미를 전문적으로 하는 가게들이 여럿 들어서서 하나의 상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매운맛에 열광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매운맛에 적응되지 않았다.
2015년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용두동과는 전혀 다른 결의 주꾸미맛을 접했는데 그만 쉽게 잊히고 말았다. 주꾸미에 집중했을 때 너무나 순한 맛이어서 그랬나 보다. 그때는 깊은 맛의 청국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음식을 먹을 때 전체적으로 그 가게가 가진 내공의 깊이를 살펴보게 된 게 최근의 일이고 보면, 아쉬움은 더욱 크다. 해외출장 가있는 동안 가족들이 그 순한 맛과 청국장의 깊은 맛을 몇 년 만에 알아챘다. 주꾸미는 봄이 제철이지만, 수급상황도 그렇고 베트남산을 먹는 게 흔한 일이 되었다.
판에서 점점 익어갈수록 흐물한 육질이 탄력을 얻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전에는 잘 관찰하지 못했던 사소한 발견들을 통해 음식을 먹는 일이 종합예술분야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깻잎과 김을 얹고 그 위에 데친 콩나물과 채 썬 무에 주꾸미를 얹고 마늘 한쪽과 고추 한쪽을 올려 쌈을 완성한다. 때는 저녁이라 우유빛깔의 막걸리를 반잔 걸치고 입안 가득 쌈을 먹는다. 양념이 자극적이지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씹는 감촉을 느낀다. 여러 번 방문하면서 밑반찬 중 양배추나 브로콜리를 같이 얹어 먹기도 하는데, 양념과 주꾸미의 육질이 안내를 하고 채소들이 그 뒤를 따라나서면서 달빛 구경을 하는 것처럼 한가로운 풍경을 입안에서 연출한다.
계란찜의 꽉 찬 느낌과 계란이 풀어진 계란국 사이에 위치한 계란탕은 언제고 쌈을 먹는 중간중간에 목을 축이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입안을 촉촉하게 적셔서 새로운 쌈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부드러운 계란은 쉽게 입안을 통과해 몸에 단백질을 공급한다. 막걸리와 쭈꾸미쌈간의 대화가 지속될수록 그 뒤에 자리 잡은 청국장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빌드업된다. 빌드업은 벤투감독을 통해 한국축구를 반석 위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건 음악을 듣건, 한 편의 그림을 감상하건, 이렇게 음식을 먹건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고유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마침내 청국장과 볶음밥이 함께 등장한다. 청국장의 냄새는 한 번에 훅 들어오지 않고 은은하게 음식상에 서서히 퍼진다. 그 은은함은 서두르지 말라는 표시이기도 하다. 천천히 밥에 청국장을 올려 한 입 먹는다. 청국장의 깊은 맛과 여운이 입안의 수많은 미각수용체들을 자극한다. 이 깊은 맛의 여운은 한동안 갈 것 같다. 음식을 먹으며 음식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추운 겨울 태백 고향집에서 한 냄비 끓여주신 청국장을 놓고 다섯 식구가 번갈아 숟가락으로 떠먹던 그 청국장 맛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그 추억이 지금 내가 먹는 청국장의 맛에 깊이를 더한다.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더 춥고 움츠려든다. 그럴수록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음식이 간절하다. 찬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공기와 따뜻한 밥 한 끼 만으로도 감사한 일임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게 된다. 내가 알던 맛과 내가 알던 환경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고 있던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맛을 재발견하는 일은 생활속에서 보석을 캐는 일과 같다. 음식을 먹은 온기는 추위를 잠시 잊게 해 줘서 잠시 동네를 산책하고 집으로 가라는 여유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달빛이 아스라이 비춘다. 쓰러져 뒹구는 낙엽들은 지난 시절의 찬란한 수고로움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그 길 위에 서서 잠시 달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