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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Oct 04. 2020

음식은 추억을 소환한다 - 사라진 가게를 추억하며

- 인사동 친절한 현자씨


내가 아는 한 인사동은 이 가게를 알기 전과 알고 난 뒤로 완전히 구분된다. 인사동에 적당한 아지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2008년에 실현되었다. 평소 존경하는 어르신이 소개해준 그 가게는 다름 아닌 어르신의 친구 부인께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상호에 나오는 바로 그 이름도 이 분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게 처음 찾은 가게의 좌석은 계단 바로 밑 자리였다. 평상을 덧붙여 놓아 다섯 명이 아늑하게 지붕 낮은 곳에서 막걸리에 다양한 안주를 먹던 기억에서 출발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아늑하고 작은 평화를 느꼈다. 


이 가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탑을 세우고 무너뜨렸다. 12년 동안의 기억을 소환하려면 역시 음식을 먹어야 한다. 9월 20일 가게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섭섭한 마음만 있었지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갑자기 호출해주신 덕분에 오게 되었다. 마침 사장님을 뵐 수 있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또 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하나씩 하나씩 곱씹으며 먹는다.


감자전은 보통의 감자전에 살짝 튀긴 감자채를 섞어 내오셨다. 바삭한 감자채 튀김과 감자전이 입안에서 서로 잘 어우러진다. 감자전의 백미는 은은하게 냄새와 입안에 퍼지는 흙 기운이다. 흙속에서 자란 뿌리 음식의 자태를 온전히 맛볼 수 있다. 매번 감자전을 먹을 때면 흙속의 자양분을 젓가락으로 먹는 기분이 든다.

원래 두릅은 3-4월이 제철이다. 제철에 먹는 두릅의 백미는 태백산 자락에서 자라는 자연산 두릅이다.  두께도 두툼하고 살짝 데친 두릅을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다. 지금은 9월인데 아마도 보관이 잘되어있었던 것 같다. 색깔도 푸른색이 빛나고 식감도 부드럽다. 괜히 음식을 잘하는 곳이 아니다. 식재료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솜씨가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데친 오징어는 보통 쫄깃한 식감인데, 여기 나온 오징어는 겉이 아주 부드럽다. 씹는 느낌이 별로 안 들면서 오징어가 헤엄친 바다내음이 아주 옅게 옅게 입안으로 스며들어온다.


삼겹살과 삶은 숙주 무침은 상호보완적이다. 한껏 육즙을 내밀고 있고 그 육즙을 숙주의 부드러운 식감이 감싼다. 그냥 육류를 먹을 때는 완전히 고기에 몰입할 수 있다. 지금처럼 채소 요리와 같이 먹으면 고기의 맛과 채소의 맛이 서로 간섭하면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물론 접시에 담겨 있을 때는 개별적으로 있지만 일단 나의 입으로 들어오면 서로 섞인다. 음식이 섞이는 것은 화학적인 결합이 아니라 물리적 결합이다. 그런데 씹을수록 점차 물리적 결합에서 화학적 결합으로 넘어간다고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그 화학적 결합은 위와 장에서 완성된다.


이 가게의 메인 메뉴 중 하나는 닭볶음이다. 닭볶음 탕이나 양념 치킨 사이의 장르가 이 가게에서 새로 탄생한 것이다. 양념은 자극적이지 않고, 닭 육즙이 탱탱하게 살아있으면서도 치킨처럼 달큼한 맛과 매콤한 맛이 어지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바로 술을 찾게 된다. 그냥 먹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근과 감자 그리고 양파 역시 닭고기와 입안에서 상호 작용을 일으킨다. 된장국은 된장의 진한 맛을 덜어내고 연하고 은은한 맛을 낸다. 숟가락이 자꾸 향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차고 넘치는 인심을 보여주는 계란탕의 비주얼은 비주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음으로써 그 풍성함이 완성된다. 집에서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특별한 비결을 가고 있을 것으로 나는 다만 추측할 뿐이다. 여기에 어르신께서 준비하신 와인.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오늘은 홍천 막걸리를 못 먹는 아쉬움을 뒤로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눈앞의 음식을 몸으로 느끼면서 먹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먹는지 알아차리고 먹을수록 제대로 음식을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과 살아왔던 날들, 살고 있는 날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얘기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이전에 내가 그 장소에서 내가 먹었던 음식 주변에 같이 묻어있는 추억을 소환해서 먹는 일이다. 그러니 가벼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2년간 수많은 추억이 소환되어 온다.


사장님과 실장님은 지난 12년간 내게 서비스의 교본을 보여주셨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인 족발요리를 위해 시장에서 직접 사 온 재료를 6시간 이상 삶아서 내놓은 족발은 음식을 넘어서 감동 그 자체였다. 틈틈이 식탁으로 오셔서 세심하게 물어보시고 필요한 것을 바로바로 주시는 마음씨는 바다보다 넓었다. 금액을 지불하지 않은 음식에서 위안과 위로와 미안함을 느낀 적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았다. 가게를 닫는 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나의 음식 자산 목록에서 한 가게가 사라진다니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아 이제 이 친절한 현자 씨를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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