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완연한 해운대 바다의 잔물결에 시선을 던진다. 약 20억년전 원시 미생물이 처음 출현했을 저 바다를 보며, 생명의 시원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내 삶을 이어오고 있는지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곰탕 한 그릇을 먹게 되었다. 벽에는 도연명의 시가 붙어있는데 그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인자와 날생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최근 나는 사람들에게 365일이 생일이라고 얘기하고 다닌다. 날생자만 생이 아니라 살 생자도 생이니 생일이란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날이기도 하다고....
생자의 생명력이 글자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아마도 그 글자를 쓰셔놓고 흡족한 미소를 짓지 않으셨을까? 사람이 태어나고, 서서히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인 날 생자와 살 생자가 사람인을 떠받치고 있다. 그게 인생인가 보구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생각해 보았다. 생명이 인간을 떠받치는 것이 인생이구나. 이 필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친절한 주인장께서 2년 전 돌아가신 어르신의 전시회 도록을 선물로 주셨다. 도연명의 시였다.
글을 쓰신 어르신은 두해 전에 돌아가셨고 이 글은 가게 문을 열면서 기념으로 주셨다고 하신다. 어떤 깊은 뜻이 담겨있을까 생각하다가 도연명의 시구대로 그러한 덧없는 인생이니 곰탕 한 그릇, 수육 한 접시와 막걸리 한잔 담백하게 먹는 걸로 퉁치기로 했다. 김광석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라는 노래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찰나에 깊이 들어오는 이 느낌을 그저 보고 즐기며 오래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고 속말로 중얼거렸다. 기쁨이 오는 가게라는 이름도 그 어른께서 지으신 것일까? 때로는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겨두고 나의 상상에 맡기는 것도 좋으리라....
곰탕 한 그릇에 담긴 맑은 국물!! 국물들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은 느낌이다. 한 술 떠서 국물의 깊이를 가늠하며 그 맛을 음미한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인 흔적이 입안 가득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맛이다. 큼직하게 썰어놓은 깍두기는 약간 숙성된 신맛인데 무는 즙이 탱글탱글하다. 숙성과 무즙의 함수관계는 생각보다 쉽지 않을 터인데 이렇게 신맛과 동시에 금방 한 것 같은 식감을 동시에 선사하다니. 국물의 여운은 입안 가득 머물며 그 기억을 놓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저 맑은 맛이 가끔씩 도깨비처럼 나타난다. 아무래도 한번 더 들러야 할 것 같다.
저녁식사로 가볍게 회를 먹은 이유는 수육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기 위함이다. 음식을 주문할 때 갖는 기대치는 그 음식의 맛을 나에게로 가져오는 기준이 된다. 기대치를 밑돌면 아쉬움이 자리를 잡고, 기대치를 상회하면 즐거움 안에 파묻힌다. 먹는 즐거움은 그만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나는 기대치를 최소화시키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낮은 기대치를 상회하는 음식은 고단한 내 삶의 보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수육을 선호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맛있는 소고기 수육을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돼지고기 수육은 웬만큼 잡내가 나더라도 새우젓, 마늘, 쌈, 막장이나 된장과 같이 잡내를 묻어버릴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 소고기 수육은 오직 소고기의 맛과 부드러운 질감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성북동의 칼국수집들을 두루 다녀봐도 내 마음에 딱 들어오는 수육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데친 문어를 더 선호한다.
수육은 나의 기대치를 훨씬 넘어섰다. 육질은 아주 부드러웠으며, 곰탕 국물이 별도로 나와서 번갈아 맛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제 먹었던 깍두기는 오늘도 변함없이 시큼하면서도 탱글탱글한 무즙을 선사했다. 양파와 고추를 삭힌 소스와 파, 마늘에 약간의 후추를 더하니 입이 즐겁다. 밤바다는 낮과 마찬가지로 잔잔한 물결로 나를 대한다. 곰탕 한 그릇의 맑은 맛과 수육의 부드러움의 여운을 바닷물결에 띄워 같이 흔들리면서 어르신이 써 놓으신 도연명의 시를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