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후배님을 회의자리에서 만났다. 나와 5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는데 독립해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아버님도 학교 근처에서 창업을 하셨는데 부자 지간 모두 성공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 시기 3년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대로 안착했다고 하니 참 반가운 일이다. 서로 얘기 나누다가 야간 라운딩을 약속했다. 갑오징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 많지 않은데
@2. 얼갈이 겉절이와 무생채
메인 메뉴를 주문하고 나오기 전의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주는 반찬을 제대로 만날 때 나는 무한한 기쁨과 희열을 맛본다. 무생채를 젓가락으로 한 점 먹는 순간, 아!! 제대로 된 음식점에 왔다는 기쁨이 온몸에 찌르르 전기로 흐른다. 좋은 무를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단맛이 나거나 너무 맵거나 너무 싱거워도 안된다. 그 세 가지를 잘 절충한 맛이 나면서도 그 근저에는 시원함이 깔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생채로 만들 수 있는 좋은 무가 된다. 그 무를 잘 손질하고 채 써는 과정 또한 상당한 노하우와 노동이 투입되어야 한다. 집에서 가끔 무생채를 할 때 채 칼에 썰어내는 과정에서 미끈하게 채 써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음식점에서 채칼로 그 많은 무를 썰지는 않겠지만 기계로 했을 경우, 무맛의 깊이를 날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생채에서 이미 확인한 주인장의 내공이 오래간만에 만나는 얼갈이 겉절이에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구수하고 시원한 겉절이가 입맛을 한껏 자극한다. 우리 존재의 근원인 땅기운을 한껏 머금고 그것을 나에게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겉절이. 음식을 먹는 일은 자연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연과 내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식재료들의 역할이다. 메인 메뉴 없이 막걸리를 한병 뚝딱 비웠다. 반찬이 맛있을 때 나는 음식욕심에 예를 미처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만다. 주인장에 대한 예의나 미안함도 잊은 채 그 반찬에 더더욱 집중하며 더 달라고 욕심을 부린다. 제주 탑동의 <산호전복>에 가면 늘 전복돌솥밥을 주문한다. 성게미역국을 같이 반찬으로 주시는데 언젠가 한 번은 한 그릇 먹고 또 한 그릇 추가로 달라고 하고, 한번 더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음식맛에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반찬을 만나 계속 달라고 했는데 하나도 안 미안했다. 주인장께서 우리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시면서 언제든 얼마든 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눈빛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3. 갑오징어 철판볶음과 갑오징어 튀김
갑오징어는 오징어 자체가 가진 두툼한 부드러움과 씹을 때의 촉감 그리고 그 씹는 스케일에서 오는 만족감과 옅은 바다내음을 맛볼 수 있는 음식이어서 굳이 다른 양념이나 재료들 없이 재료만 나오고 소스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철판볶음 형태로 나오니 일단 그동안 먹었던 모양과 다르니 좋다. 같은 것을 맛본다는 것은 안정적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다른 것을 맛본다는 것은 새로운 맛세상과 만나는 일이니 설렘이 동반된다. 갑오징어와 양파를 비롯한 채소 등을 살짝 데친 뒤에 거기에 팽이버섯과 청경채와 차돌박이를 적절히 장식해서 나온 모양이 너무 예쁘다. 깻잎에 김을 올리고 거기에 갑오징어와 채소 그리고 차돌박이를 얹어 한 입 싸 먹는다. 갑오징어의 두툼한 식감을 중심으로 고기와 채소들이 거들면서 새로운 맛의 세계로 빠져든다.
튀김옷에 기름이 많이 배어있지 않아 갑오징어의 담백함이 그대로 살아있다. 워낙 자체오 완벽한 식재료여서 그 맛에 대해 이런저런 표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그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검정 먹물을 입에 묻혀가면서 먹던 군산에서의 기억과 갑오징어 숙회에 고추냉이를 간장에 찍어 먹던 추억들이 뇌를 통해 입안에 신호로 번진다. 지금 먹고 있는 맛 위에 예전의 맛의 추억이 더해져 입안에서는 갑오징어 파티가 열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어느새 식탁 위에서는 일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대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잠시 뒤 같이 즐길거리에 대한 얘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힌다. 갑오징어가 그 이야기들을 잇는 실마리처럼 느껴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맛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추억들도 이 시간이 지나면 곧 희미해지겠지만, 그 희미해진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 나의 인생이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 먹고 있는 행위의 장엄함고 숭고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저 주어지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은 없다. 사소한 순간은 없고 모든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고, 나와 같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들이며, 내가 먹고 있는 이 음식. 그 식재료가 자란 자연, 식재료를 잡아서 운반해 온 사람들의 손길, 오랫동안 쌓은 내공을 아낌없이 몰입해서 이런 훌륭한 음식으로 만나게 해 준 주인장.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
못내 아쉬워하는 나를 위해 막걸리 몇 병과 무생채와 얼갈이 겉절이를 후배님이 싸들고 온다. 헐 이런 고마운 선물이라면 마다할 내가 아니지!! 밤이 깊어가고 얘기꽃을 하나씩 만들어 밤하늘 달님 곁에 하나씩 걸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