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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Aug 26. 2023

시그니처 메뉴를 만나는 즐거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시그니처란 단어를 이렇게 흔하게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이런 흐름이 최근에 등장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장 멋진 경험을 올려놓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영국의 어느 해변에 가서 자리를 깔고 뭔가를 먹는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을 여행의 중심에 놓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놀랐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유연하고 직선으로 들어가는 과감함에 부러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경험에서 음식으로 장르를 옮기면 시그니처 메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골프를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내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시그니처 홀이라는 말이 떠도는 걸 보면 나 역시 뭔가 핵심에 가닿는 나만의 특별한 느낌과 경험을 갖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사전적으로는 Signature란 서명과 특징이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단어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고급 브랜드의 상표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특별히 제작한 제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그 기업만이 제조할 수 있는 특별한 제품이라는 의미! 격투기 경기에서 특정 선수가 즐겨 사용하는 독창적인 기술을 "Signature move"라고 한다. 더 넓게는 어떤 사람을 대표하는 무언가를 "시그니처 카드", "시그니처 픽", "시그니처 기술"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 사람을 대표하는 무언가!! 식당에서는 "시그니처 디시"로 카페에서는 "시그니처 메뉴"라고 부른다. 다른 카페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창적인 메뉴라는 설명이다.


최근 인공지능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을 만났는데, 올해 예순이 넘었지만 대학원생의 외모를 갖고 계신 부러운 분이다. 나이가 들면 달라지는 것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달달한 음료를 선택하게 된다는 말씀이 떠올라, 시그니처 메뉴로 가게 이름이 들어간 세담 라테를 주문한다.

1987년 대학 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녹차를 거의 매일 마셨다. 인사동을 찾아 값싸고 좋은 녹차를 사서 동아리 방에서 우려먹었었다. 2004년 초임계기법을 활용해 녹차의 카페인은 90% 이상 제거하고 카테킨 등 녹차가 가진 좋은 성분은 80% 이상 먹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신 교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녹차에 대한 관심이 최고로 올라갔었다. 카테킨은 녹차에서 발견되는 폴리페놀의 일종으로 지방 산화를 증가시켜 체중 감량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항산화 작용을 통해 심혈관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페 라테와 녹차의 만남은 어떨까? 커피 라테에 녹차가 섞여 묘한 색상을 연출한다. 음식을 먹기 전 모양과 색상을 살피는 일은 이제 하나의 의례가 되었다. 한 모금 달콤 시원한 맛을 음미한다. 그 입안 머물던 음료가 저 멀리 넘어가고 입안에는 잔상이 머무른다. 구수한 커피 향에 녹차의 진한 향이 섞여 머무른다. 눈을 감고 잠시 이 맛의 여운을 느낀다. 다시 한 모금하면서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하는 일요일 오후의 느긋함을 같이 머금는다. 아까 거기의 기억들과 지금 여기의 느낌, 이따 갈 거기에 대한 생각이 버무려진다. 달콤 시원 커피와 녹차의 향기가 내 생각을 맑게 정리해 주는 것 같다.


한꺼번에 벌컥벌컥 마시지 않고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쳐다보다가, 탁자 너머 흰 벽을 보다가, 눈을 감고 입안에 들어왔던 그 맛을 헹구고 난 다음 다시 한 모금 먹는다. 상큼하고 은은한 단맛이 입안을 자극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설탕과 아이스크림의 단맛에 빠져 부모님께 엄청 혼났던 기억이 새롭다. 그건 집착이었고 도피였다. 오늘 이 단맛은 나의 일상을 은은하게 자극한다. 단맛은 바로 나의 몸으로 직진하지 않고 부드러운 우유와 커피와 녹차의 향속에 숨어 은은하게 나를 자극한다. 도파민이 약간 분출되는 느낌을 상상한다.


조용한 일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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