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했던 더위가 다시 찾아왔다. 올해도 잘 버틸 수 있을까 했는데 14년째 에어컨 없는 여름을 견디고 있다. 추운 날과 더운 날들을 맞으며, 견디는 힘을 길러왔지만 길러온 힘과 지금 견딤과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지금 더위는 꽤나 견디기 힘들다. 오늘도 안전문자에 폭염주의보가 떴다. 더위를 견디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바로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시원한 음식을 먹는 일일 것이다. 시장에 들러 사 온 찐 옥수수, 계란말이, 팥죽, 만두를 먹고 있는데, 이미 내 마음은 저기 달콤 시원한 팥빙수 쪽에 가서 이곳을 구경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추억을 먹는 것이다. 더운 여름과 팥빙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처럼 느껴진다. 아주 어릴 적 손으로 돌리는 기계에 서걱서걱 썰려 나온 얼음들은 알갱이가 굵고 거칠었다.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이라 얼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고급스러운 일이었다. 달콤한 팥과 콩가루와 연유와 설탕 알갱이들이 기억 속에서 점점이 소환되어 온다.
팥빙수 작은 사이즈와 아아를 주문한다. 더위가 짙은 만큼 주문하고 나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시간의 상대성과 나의 견디는 힘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다가 짠 하고 나타난 팥빙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음식을 먹기 전에 음식의 모양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손길을 생각하게 되고, 음식이 내 몸과 반응을 일으킬 수없이 많은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밥 먹을 때부터 생각해 온 음식을 마주 대하면서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모양을 살펴본다. 동그란 아이스크림과 진한 색깔의 팥, 노란 콩가루와 떡, 하얀 얼음 알갱이들을 찬찬히 살핀다. 각각의 재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과 같이 해온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에 접어둔다. 이 재료들이 섞여 만들어낼 달콤 시원함을 생각하다가 문득 비빔밥을 떠올렸다.
먼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다. 산미가 살짝 가미된 고소함이 입안에 퍼진다. 드디어 팥빙수의 얼음 알갱이만 한 술 떠서 먹는다. 아무 맛이 없는 얼음알갱이들과 달리 달콤한 얼음 알갱이들이 선사하는 시원함에 기꺼이 온몸을 맡긴다. 팥과 콩가루, 떡, 아이스크림을 골고루 섞어서 한 입 먹는다. 커피가 정리 정돈한 맛의 지평 위에 팥빙수의 달콤함이 더 선명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팥빙수가 정리 정돈한 맛의 지평 위에 커피의 고소함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간다.
달콤함과 고소함의 밀고 당기기 경기를 시원함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잔잔한 음악이 선사하는 고요함과 정갈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음식명상에 들어간다. 오직 나와 팥빙수와 아아 만이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한 여름 낮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지난 일주일 동안 분주한 일상과 잡념들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진다. 날이 갈수록 음식이 내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커져간다. 뭔가 대단한 일들이 벌어질 듯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틈으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편한 공간, 편한 시간, 편한 사람들과 맛난 것 먹으며 사소한 일들을 벌이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닐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