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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16. 2023

감동적인 맛의 연어 수프 그리고 사장님의 배포


아침 찬바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눈 덮인 공원은 고즈넉하고 조용하다. 수령이 오래된 자작나무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안내한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찬 바닷바람이 불어오니 어깨가 더욱 시리다. 애초에 기대했던 시장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하카니에미 시장은 독립적인 건물로 되어 있다. 난 항상 시장하면 시끌벅적하고 가게들 앞에 물건들이 길에 진열되어 있는 장면만 떠올렸는데, 약간 낯설다. 1층은 고기와 생선 및 채소를 파는 식료품 가게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2층은 액세서리와 의류 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산한 풍경이었다.


귀걸이가 전시된 가게에서는 오랫동안 가게를 지켜오신 사장님께서 플래카드에 걸려있는 사진이 본인이라고 하는데 본인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로 사람들이 와도 적극적으로 홍보나 마케팅을 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헬싱키 사람들의 특성을 살짝 살펴볼 수 있었다. 과묵하고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며 말을 많이 섞지 않는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목적은 현지 가이드님께 추천받은 연어 수프였으므로 다시 둘러본다. 2층 식당인가 했는데 비건 음식 전문점이라고 한다. 잠시 열어본 노란 수프는 아마도 호박 수프가 아닐까 추측하며 연어 수프 가게를 물어보니 1층으로 내려가면 있다고 했다.



한번 더 살펴보니 생선을 파는 가게 맞은편에서 연어 수프를 판다. 생선가게와 같이 운영하는 곳이다. 생선가게는 약간 터프하신 여사장님이, 연어 수프가게는 밝은 표정의 남사장님이 운영하고 있었다. 테이블이 다섯 개 밖에 되지 않는데,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한 5분 정도 사장님이 분주하게 우리 일행이 앉을 세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이미 자리 잡고 계신 분들을 밀어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다. 연어 수프 3개와 마침 생맥주 탭이 있길래 헬싱키 로컬 생맥주인 AURA를 한잔 주문했다.    


약간 말간 국물의 비주얼이 내 입안과 내 몸속에서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궁금하다. 잠시 연어 수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요즘은 음식을 먹기 전에 그 음식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배고픔을 잠시 뒤로 미뤄두는 이 공복상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과 음식을 앞에 두고 여유를 가지면서 그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잠시 생각해 보는 일종의 명상이다. 음식은 제각기 독특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음식의 모습이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이 가게를 지키면서 만들어왔을 음식의 내공 한 단면을 내가 맛보는 지금 이 순간은 시간과 시간이 서로 만나는 접점이다. 축적된 시간이 나의 지금 이 순간과 만나는 것이다.


이제 한 숟갈 떠서 먹어본다. 말갛고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동시에 입안에 퍼진다. 내 어깨와 뺨을 스치고 지나간 찬바람들이 수프의 온기 안으로 밀려들어와 몸이 녹는다. 부드러운 연어의 질감이 수프에 녹는다. 감자와 푸른 채소잎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사중주 내지는 오중주.... 아우라 한 모금과 연어수프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 음식을 먹고 그 지역의 술을 먹어보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를 구현하는 위대한 순간에 함께한 일행들 역시 감동적인 표정들이다. 연어 수프를 완전히 비울 때까지 오직 이 음식의 맛에 집중한다.


문득 옆 테이블에서 와인 한 잔을 조금씩 마시고 계신 할머니는 여든은 넘어 보이 신다. 주인장께서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내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시는데 아마도 단골손님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이 유쾌한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리라. 완전 대만족 하고 나서, 카드로 계산을 했다. 이런 훌륭한 음식을 내가 사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오늘 같이 다니면서 먹을 음식 중 가성비 갑이라 순발력도 함께 발동되었다. 카드로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두 번 결재가 된 것 같다.


다시 가게로 들어가 혹시 두 번 결재된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내가 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남사장님은 얼른 여사장님에게 이 골치 아픈 상황을 토스했다. 그런데 이 두 분 모두 정확히 자신들에게 결재된 내역을 전산상으로 체크하지 않는 듯했다. 내 말만 믿고, 곧바로 여사장님이 결재금액을 현금으로 주신다. 아마도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시는 것 같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뢰 가득히 화끈하게 현금으로 돌려받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행들 모두 놀랐다. 아마도 다른 가게, 다른 지역, 다른 나라, 한국 등등이었으면 이렇게 현금으로 돌려주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귀국 후 월요일에 지난 주말 결재 내역이 뜨는데, 한 번 결재된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곧장 문자로 가이드님께 이 상황을 설명드렸다. 고맙게도 가이드께서 안 그래도 그 시장을 지나갈 일이 있는데 계좌번호를 받아서 내게 전달해 주셨다. 외화 송금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절차가 복잡하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거의 12시간이 지나 최종 송금 내역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동적인 맛의 연어 수프와 감동적인 여사장님의 태도에 누가 되지 않았음에 대해. 문자로 여사장님이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왔다. 아니 내가 정말 감사하다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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