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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서 3일 : #9 미술사 박물관 2

by 새로나무

그리스와 로마. 그 이름만으로도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해 준다. 희랍철학은 잠시 머물다 빠져나오고 다시 시도하고 미끄러지고, 그러다 가물가물 잊힐만하면 책을 펼쳐놓았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를 졸업하고 뒤늦게 공부하면서 분량만큼이나 묵직한 무게를 깨닫기도 했다. 그래도 그 순간은 잠시 뿐이고 곧 사라져 버린다. 철학은 어떻게 하면 공부한 내용이 재빨리 사라지는가 내기하는 학문처럼 여기게 된 것도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해서다. 그래도 플라톤의 상승과 하강 개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일상생활에 영감을 주는 스토아철학의 줄거리들은 겨우 남아있다.


이런 파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이 작품들을 보는 순간 짜깁기하듯이 하나씩 들어온다. 이 조각상들은 자세나 표정들이 심각하다. 눈앞이 아닌 어디 다른 차원의 뭔가를 응시하는듯한 표정들.... 이집트관과는 달리 좀 더 섬세하고 사람의 모습과 표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각상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이미지들이 생각나듯 이 조각상들은 뭔가 깊은 사고를 하고 뚫어지게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한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고대 희랍(그리스)에서 교육(παιδεία, 파이데이아)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간을 완전한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총체적 과정이었다. 그리스 교육의 목적은 지성과 윤리 및 신체적 능력을 고루 갖춘 개인의 완전한 성장, 도시국가인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덕목을 수행하는 시민을 육성하고는 것을 의미했다. 작품들은 사후세계와 영원에 가있지 않고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했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KHM)은 그리스-로마 유물 컬렉션이 뛰어나다. 박물관의 고대 유물들은 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것으로, 신화와 역사, 예술적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3,000년부터 서기 500년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조각, 도자기, 보석, 장식품, 청동상 등이 인상적이다.


이집트 예술은 종교적, 장례적 목적이 강했다. 파라오와 신을 숭배하는 종교적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사후 세계를 위한 영원성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정형화된 양식과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반해 그리스 예술은 인간 중심적인 특징을 가지며, 개인의 아름다움과 현실 세계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신과 인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신체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리얼리즘이 발전했습니다.


이집트 조각과 회화에서는 ‘정면성과 엄격한 법칙(카논, Canon)’이 적용되었다. 인물을 묘사할 때 머리는 측면, 눈은 정면, 상반신은 정면, 다리는 측면으로 그리는 방식이 지속되었다. 또한, 사회적 지위에 따라 신체 비율이 달라지며, 이상화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리스 조각에서는 ‘이상적 인체 비율’이 발전했으며,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해부학적 정확성을 추구했다. 초기에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정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점차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S자 곡선)’를 통해 자연스러운 인체 균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조각은 돌이나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전면성을 유지하고 기념비적인 특성을 띠었다. 대부분의 조각은 특정 장소(사원, 피라미드 내부)에 배치되었으며,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형식을 따랐다. 그리스 조각은 독립적인 자립 조각이 등장하여 360도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또한, 인간의 움직임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역동적이고 극적인 조형미를 갖추게 되었다.


이집트 예술이 영원성과 종교적 의미를 강조한 반면, 그리스 예술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현실적인 움직임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두 문명 모두 후대 예술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으며, 그리스 예술은 이후 로마 예술과 르네상스 미술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로마 조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강한 사실주의이다. 특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인물상들은 현실적인 주름, 개별적인 표정, 심지어 피로감이나 노화의 흔적까지 그대로 담아낸다. 로마 예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기록성과 선정성(프로파간다)이다. 전쟁과 승리, 정치적 업적을 기념하는 부조가 많이 제작되었다. 로마 예술은 그리스 예술을 많이 차용했으나, 그리스 조각의 이상적 미학보다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을 강조했다. 그리스 조각을 직접 모방한 작품들도 있지만, 로마의 조각은 더 개인화되고 다채로운 주제를 담고 있다. 그리스 조각의 신화적이고 이상적인 인체 조형미를 유지하면서도, 실제 현실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원형의 접시들과 문양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다른 박물관에서 보기 힘든 그리스와 로마의 도자기들은 뭔가 이색적이면서도 오랜 세월을 거쳤음에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그 완성된 형태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작품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어서 하나하나의 작품을 새겨서 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다리도 서서히 아프기 시작한다. 최선의 방법은 스마트폰에 담아 일상 속에서 생각날 때마다 꺼내 다시 감상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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