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019년 12월로 돌아간다. 전날 마신 맥주의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으로 서둘러 갔다. 오후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있었지만 좋아하는 회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게으른 숙취를 이겼다. 도착하자마자 일행과 헤어져 부지런히 그림과 그림사이를 오가는 데 집중한다.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것은 뒤로하고 이 수많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는다. 거의 5백 장이 넘게 찍었다. 이 쯤되면 편집증에 가깝다. 감상보다 수집에 초점을 두는 게 맞는 건지 헷갈린다.
그러다가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멈췄다. 중년의 모습을 한 그는 뚜렷하게 잘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처럼 그 자리에서 나를 응시한다. 먼 거리에서 가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며 그가 그렸을 시점의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한다. 생생한 붓터치와 세월의 풍화를 견딘 색감들, 무엇보다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절정으로 향하는 한 화가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 관한 스토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의 작품세계와 관련해서는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가 죽기 전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작품이 렘브란트의 작품이라는 것. 불행한 가족사를 안고 살았다는 것,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그리려 했던 사람이라는 것.....
오늘은 사진을 찍는 것 말고 그림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관을 거치며 이미 상당한 시간을 써서 회화에 집중할 에너지가 많지 않은 것도 한 이유가 되리라.
풍경에 대한 정교한 묘사를 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구도와 비례, 원근, 색감의 스펙트럼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용할 것인지, 그 색감들 각각을 표현하기 위한 물감들의 조합은 어떻게 할 것인지, 농담의 수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펼칠 것인지, 이런 것들을 구현하기 위해 스케치 단계에서 구도를 펼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사람은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 정교한 묘사와 멋진 구도, 아름다움에만 초점을 맞춘다. 시간을 거슬러 작가가 보고 있는 풍경과 사물들에 시선을 맞춘다. 이건 어렵지 않다. 모든 작품들을 일일이 감상하지 않더라도 아쉽지 않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 다시 와 섰다. 이번에는 세월이 흘러 후기에 그린 자화상과 같이 들여다본다. 젊은 시절의 멋진 옷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나이 들어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렘브란트는 생애 동안 약 80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의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묘사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시각적 일기"와 같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렘브란트 자화상은 자신감과 야망을 드러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의 그림은 주름진 얼굴과 어두운 색조를 통해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무게를 표현한다. 그가 견뎠을 수많은 불행한 가족사적 사건들과 그의 경제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화상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화가들에게 자신의 얼굴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모델이었다. 거울만 있으면 언제든지 연습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빛과 그림자의 표현, 감정의 묘사, 붓 터치의 실험을 시도했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의 극적인 대비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자화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과 감정을 기록하는 시각적 연대기가 된다.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시각적 답변이다. 특히 렘브란트의 후기 자화상들은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얼굴에 나타난 상처, 깊어진 주름, 무거운 표정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한 인간의 철학적 명상과 같다.
예술가가 스스로를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직접 정의하고 사회적 위치를 고민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 정체성이 중시되면서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예술로 승화했다. 미켈란젤로, 뒤러, 반 고흐, 프리다 칼로 등 수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통해 자아를 표현했다. 자화상은 단순한 개인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치관과 미적 경향을 반영한다. 렘브란트의 경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자화상이 유행하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당시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예술가의 위치와 경제적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의 후반기 자화상에서는 부와 명예를 잃은 후, 인간적인 고뇌와 허무함이 깊이 드러난다.
연중 계절이 시작되는 시기가 오면 갑자기 회화 작품들을 구글에서 다운로드한다. 여기에 필요한 준비물은 도서관에서 빌린 미술 관련 서적들이다. 수많은 화가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들의 작품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화질도 좋아서 어떤 사진들은 예리한 붓터치와 아름다운 색감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피터르 브뤼겔의 작품은 겨울이 오면 늘 내려받아서 틈날 때 감상하곤 했다. 어릴 적 태백에서 보았던 눈 내린 풍경들이 겹치면서 가슴 한편에 내가 돌아가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을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풍경화와 농민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는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시대적 메시지와 인간 삶의 본질을 담아냈다. 브뤼겔의 풍경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독립적인 주제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그림 속 자연은 극적인 빛과 그림자, 구체적인 질감,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반영하며 자연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눈 속의 사냥꾼(The Hunters in the Snow, 1565)을 보면, 겨울철의 차가운 공기와 눈 덮인 풍경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화면 왼쪽의 어두운 나무들과 오른쪽의 밝은 설원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사냥꾼들은 피곤하고, 개들은 배가 고픈 듯 보이며, 이는 삶의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화면 중앙에는 얼어붙은 강에서 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며, 이로 인해 그림이 단순한 사냥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계절을 담은 서사적 장면이 된다. 풍경의 원근법이 깊이감을 주며, 멀리 보이는 알프스 산맥과 하늘이 무한한 공간감을 형성한다.
그의 풍경화에는 배경과 사람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사람들의 일상이 주인이자 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이지만, 일상 속에서 주인의식 혹은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하고 산다는 자부심을 가질 기회가 흔치 않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아까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같이 걸어와 내 삶에 내 일상에 말을 걸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작품 속에서 평안과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여기가 좋다. 정말 좋다.....
발길을 돌리기 아쉬워하던 차에 눈에 들어온 작품인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대리석을 깎고 다듬어서 만들었을 터인데 천의 질감도 놀랍지만, 그것보다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에 가까운 표정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이 주제가 가진 범위에 비해 많은 작품들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 평범한 일상성의 경계에 가닿았다고 느끼기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