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를 가볍게 스쳐 지나간 뒤, 꽤 오랫동안 미술관에서 머물렀다. 서서히 시장기가 밀려온다. 레오폴트미술관, 훈데르트바서 박물관, 현대 미술관 등이 밀집한 광장에 이르러 편하게 쉴 수 있는 세련된 디자인의 쉴 곳에 앉는다. 잠시 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어느새 슬쩍 하늘을 보고 눕는다. 시리도록 밝은 햇살이 저만치에서 바로 코앞에 와서 비타민 D합성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권한다. 여행 떠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 길 위에 있다. 잠시 앉아 쉬면서 검색을 했는데, 지중해 음식을 파는 곳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 거리가 제법 된다. 광장을 지나 현대미술관을 끼고 두 번 언덕을 올라가니 커브길로 트램들이 오간다. 바로 그 거리 끝자리에 위치한 식당으로 들어간다. 적당한 감상, 적당히 가벼운 속, 적당히 걸어서 힘들기 전에 멈춘 그 타이밍이 완벽하다. 이제 식사만 완벽하면 된다.
변경가능한 메뉴들로 빼곡한 칠판 글씨들은 직접 썼을 거 같은데, 저런 정성하나하나를 보면서 문득 벽면을 둘러본다. 오래된 낡은 포스터들 사이로 카프카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고 롤링스톤즈의 공연 벽보도 눈에 들어온다. 크기가 같은 걸로 봐서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올려놓은 듯하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음식이라는 예술의 장르도 잘 다룰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 아니라, 기대가 커야 기대한 만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기대가 작거나 없으면 설렘도 없고, 입안의 아밀라아제 분비도 쉽지 않다.
처음 접하는 맥주 브랜드라 일단 설렌다. 더구나 1410년에 생긴 양조장이라니!! 그 세월의 깊이와 무게가 숨 쉬는 맥주 한 모금을 쭈욱 들이키며 입안 갈증을 해소하고, 짜릿한 시원함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에 집중한다. 비스킷도 빵맛도 아닌 명쾌하고 맑고 시원한 맛을 오래도록 첫 한 모금에서 음미한다. 아마도 1410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플라세보 효과가 더해져 과장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생맥주 첫 한 모금의 맛의 여운은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유럽을 여행하는 맛은 생맥주에 있다고 생각한다. 맥주에 진심인 이들이 너무 많아 반갑기도 하지만, 켜켜이 쌓인 역사적 내공 속에 깃든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한 잔 속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Schremser 맥주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발트피어텔(Waldviertel) 지역에 위치한 슈렘스(Schrems) 마을은 체코와의 국경과 인접해 있다. Schremser 양조장은 1410년경부터 맥주를 양조해 온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역의 청정한 자연환경과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결합하여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데, 특히, 유기농 재료를 사용한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생산한다고 한다. , 메뉴판의 ‘Schremser Bio‘ 궁금하다는 핑계로 라거를 얼른 한 잔 비우고 주문했다. 유기농 보리와 홉을 사용하여 양조되며, 필터링 과정을 거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풍미를 제공한다고…. 탄산감에 실려오는 독특한 맛은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맛이다. 옅은 에일과 옅은 밀맥주 사이 경계 어딘가에 있을 거 같은데, 맛이 묘하다.
짠 득한 식전빵과 고소한 수프가 잘 어울린다. 뭐 이것 만으로도 완벽하다. 레몬을 뿌려 먹는 것이 이제는 습관으로 자리 잡혔다. 시큼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음식에 더해져 씹기 전부터 먹는 동안 내내 입안의 침샘을 자극한다. 침샘의 자극은 소화와 연결된다.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독특한 오징어는 유난히 입안에 착 감겼다. 피망과 당근을 먹고 나면 이들이 대장에서 분해되어 몸속에서 좋은 역할을 한다. 단쇄사슬지방산의 효과를 배운 것과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서로 연결된다. 플라세보 효과를 제대로 느낀다. 잡내 없는 양고기를 먹고 나니 이 식당의 내공을 제대로 파악한다. 그 음식솜씨와 가성비를 생각하니 왠지 하나 더 주문해도 될 듯… 연어를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기대이상이다. 또 한 번의 성공을 해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과 느긋한 오후의 식사 속에 노곤해지며, 세상을 다 가진듯하다.
보통 여행을 가면 한번 갔던 가게는 아무리 맛이 있어도 다시 가지 않는다. 다음번에 다시 오면 몰라도 같은 여행일정에서 색다른 곳을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행의 끝자락 3일간 다시 비엔나에 올 예정인데, 그때는 큰 딸이 합류한다. 소개해주고 싶기도 하고, 다시 한번 맛보고 싶기도 하다.
예쁜 골목을 보면 아찔해진다. 비엔나의 이 골목도 오래전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자동차가 없고 사람과 말, 수레가 다니는 좁은 길을 중심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오래된 것들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들을 허락하는 완급조절이 낳은 멋진 골목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가끔 여행에서 돌아와 골목길 사진들만 보며 멍 때리는 즐거움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