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토마토, 양상추, 콩, 비건햄과 견과류, 요구르트, 치즈, 계란 프라이와 스크램블. 그리고 손질해 놓은 과일들. 대부분 장에 좋은 음식들이라 아주 만족스럽다. 채소에서 시작해서 단백질로 갔다가 탄수화물로 가는 이 순서는 쉽게 허기를 느끼거나 혈당스파이크를 일으키지 않는 식사방법이다. 이 식습관으로 20시간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허기지는 일이 없어졌다. 탄수화물을 뒤에 배치하는 것만으로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식을 먹고 점심을 건너뛰울 요량이지만 과식은 발걸음을 지치게 만들 수 있다. 오래간만에 빵냄새를 맡으니, 손이 계속 간다. 버터만 발라도 빵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평소 안 먹던 빵을 바게트, 크루아상, 검은 빵, 단 빵 등 여러 종류를 버터에 발라 치즈, 햄 등과 싸서 먹었다. 안 먹던 빵을 많이 먹어 늦은 오후 결국 장에 약간에 탈이 나고 말았다. 지나치게 많이 음식을 탐하는 유혹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랗고 청명한 하늘, 미풍이 볼을 스치는 환상적인 날씨다. 지난여름 내내 몸에 배어있던 더위와 땀들이 내 몸에서 사라지는 느낌은 마치 상처부위가 아물어서 다 낫기 전에 간지러운 느낌과 비슷하게 온몸을 간지럽힌다. 봅 여름 가을 겨울 중 가을을 좋아했었는데, 그 이유를 주로 약간의 쓸쓸함에서 찾았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더위에 지치다 보니 가을이 좋은 이유가 명확하다. 더위를 씻어내는 바람과 모든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는 맑음이 좋기 때문이다.
대로에서 골목길을 우회하자 알폰스 무하 박물관이 보였다. 한 차례 학생들이 보고 지나간 뒤로 한적하니 그림 감상하기에 딱이다. 2011년 겨울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아주 추운 날씨여서 그림들을 온전히 감상하지 못했다. 우아한 여인들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간 기억만이 해마에 저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디자인적 요소와 회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고 있었다. 마트에 가면 새로운 디자인, 신제품의 디자인에 반해 충동구매를 자주 했었는데, 그 본능이 무하의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일 수 있다. 회화가 가진 깊은 세계와 본능과 감각에 충실한 디자인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면서도 모호하지 않은가? 무하는 그 경계 중 회화라는 동네보다는 디자인이라는 강 건너편에 더 자주 방문하지 않았을까?
이번에 특별히 새롭게 보게 된 대량생산 초기의 비스킷과 초콜릿 제품 디자인과 공연포스터와의 연결 지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화려하고 우아하다. 그가 현실에서 만난 여인들의 실제 모습보다 한 두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하지 않았을까? 아침에 그림을 보는 일은 몸과 마음의 묵은 때를 벗기고 거기에 작가의 세계를 살짝 얹어 약간 위로 뜨는 느낌을 받는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0)는 1860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현재 체코의 모라비아 지역)의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무하의 아버지는 법정 서기로 일했으나,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매우 신앙심이 깊었는데 무하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지역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한 무하는 처음에는 고향에서 조각가로 일하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빈으로 떠나 무대 디자인과 장식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무하의 예술 경력은 1887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파리는 예술가들에게 기회의 땅이었고, 무하 역시 더 큰 성공을 꿈꾸며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그는 아카데미 쥘리앙(Académie Julian)과 아카데미 콜라로시(Académie Colarossi)에서 예술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초기에 무하는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으며, 생계를 위해 삽화가로 일하면서 학업을 병행해야 했다.
1894년, 무하의 인생을 바꾼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가 그의 첫 번째 주요 의뢰인으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휴가 중이어서 무하에게 의뢰가 들어와 베르나르 주연의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포스터를 제작한 무하는 단번에 파리 예술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베르나르와의 협업은 그의 경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는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제작하며 아르 누보 양식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하는 파리에서 상업 예술가로 활동하며 담배, 향수, 초콜릿 포장지, 그리고 잡지 삽화 등을 그리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그는 예술과 상업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하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1910년 그는 파리에서의 상업적 성공을 뒤로하고, 고향 체코로 돌아가 민족적, 애국적인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는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로, 이 대규모 연작은 슬라브 민족의 역사적 사건과 신화를 다루고 있으며,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자부심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무하는 20년 동안 이 작업에 몰두하며, 자신이 태어난 민족과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무하는 이 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국장의 디자인, 동전, 우표 등을 제작하며 체코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단순한 장식 예술가가 아니라, 민족적 자각과 정치적 해방을 예술로 표현한 사회적 예술가로 거듭났다. 1939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무하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민족적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치에 의해 게슈타포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미 고령이었던 무하는 심문 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습니다.
무하의 작품은 유기적인 곡선과 장식적인 성격을 가진다. 곡선미를 강조하며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유기적인 패턴과 꽃, 식물, 곤충 등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등장하는 여성들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화려한 드레스, 그리고 장식적인 배경과 함께 묘사되며,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세밀한 선과 풍부하고 화려한 색감으로 인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회화와 디자인, 예술과 상업성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능력의 영역을 마음껏 개척한 위대함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또다시 편집욕구가 발동한다. 아이패드에 전시된 작품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언제 꺼내볼지 알 수는 없지만….
아쉽게도 내가 보고자 했던 슬라브 서사시는 없었다. 또 다른 여행기회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숙제를 남겨놓는 것도 좋은 일이지. 당시 사람들이 비스킷이나 초콜릿을 먹기 전에 포장을 뜯으면서 그의 디자인에 매료되었을지 상상해 보면 즐거웠을 것이다. 눈이 즐겁고 입이 즐거운 일이야말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