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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3일 : #6. 맥주 탐방

by 새로나무


프라하성을 향해 출발했다. 사람이 많이 붐비는 카를교가 아니라 마네수프 브리지로 올라간다. 중간에 빗방울이 살짝 떨어졌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좀처럼 만날 수 없다. 먼지가 별로 없어서 그냥 식물처럼 물을 몸으로 받아내는 습관? 한참 계단을 오르면서 언덕 위와 시내를 번갈아 바라본다. 12년 만에 다시 본 프라하성은 웅장하다. 거무튀튀한 빛깔이 주는 묵직함과 높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갔을 손길들을 그려보면서 점점 압도된다. 티켓을 사는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다. 성비투스 대성당의 웅장함 그리고 무하의 스테인 글라스를 떠올리며 기다릴까 하다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그냥 내려간다.




프라하성은 870년경 보헤미아 왕조의 첫 통치자인 프르셰미 슬 왕조( Přemyslid dynasty)의 보리보이 1세(Kníže Bořivoj I)에 의해 처음 건설되었다. 10~11세기에 걸쳐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세워졌고, 14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4세(Charles IV) 시대에 대대적인 고딕 양식 개조가 진행되었다. 16세기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 르네상스 스타일이 더해졌으며, 이후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Empress Maria Theresa)의 시대에는 바로크 스타일이 도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한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체코 공화국 대통령이 거주하는 공식적인 정부 건물이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프라하성 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로, 체코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건물이다. 이곳에서 체코 왕들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이 열리기도 했다. 10세기경, 성 바츨라프(St. Wenceslas, 체코의 수호성인)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작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세워졌고, 1344년 카를 4세가 본격적으로 고딕 양식 대성당 건설을 명령했다. 프랑스 출신 건축가 마티아스 아라스(Mathias of Arras)와 독일 출신 건축가 페트르 파를 레르(Peter Parler)가 참여하여 초기 건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여러 전쟁과 재정 문제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었고, 결국 1929년에야 완공되었다. 따라서 대성당에는 초기 고딕, 후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곳의 스테인드글라스(Art Nouveau Stained Glass Windows)는 다른 성당들과 달리,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아름다운 유리창이 있으며, 체코 역사의 주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브런치에 사용하고 있는 필명 <새로 나무>는 막내딸이 지어주었다. 주변의 충고나 행동 변화에 대해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려는 자세가 보기 좋다고 앞으로 더 멋진 사람, 든든한 존재가 되길 바라는 기대를 담았다고 했다. 사람은 한 번에 성장하지 않고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퇴보할 수도 있다. 그걸 경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 또한 매일매일 주어진 과업이다.


생각할 것들이 많은 가을 한복판임을 알려주는 나무들. 꾸준히 성장해 온 이력과 수많은 일들이 지나간 흔적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힘이 그 위에 얹어있다. 길에서 배우고 길에서 얻고 더 단단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 나무들처럼, 언제나 새로 태어나는 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광석이 형이 노래한 나무처럼....


"....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요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 하오"

- 김광석 <나무> 중

프라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성벽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저 멀리 미세한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어제 눈여겨봐 뒀던 카페를 가기 위해 카를교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12년 전 내려갔던 길의 기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기억이 어떤 경로로 인출되는지 알 수 없지만, 기억을 인출해 낸다는 경험은 신기하고 신비스럽다.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경험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인출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인출될지 알 수 없지만 사진이 혹은 몇 글자 끄적인 글들이 그 인출을 도와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카페 입구는 작은 책방을 들어가는 느낌이었는데 통로를 지나 안쪽 자그마한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뒤편 뜨락에도 테이블에 사람들이 빼곡하다. 작지만 아늑한 아지트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도 이렇게 한적한 카페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선물이다. 카페에서 생맥주 메뉴를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입안에 군침이 돈다. 오늘 저녁을 위해 딱 한잔만. 치킨 수프는 맑고 가벼운 맛을 선사한다.


카를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리 중간쯤에 일어났을 때 스트리트 뮤지션을 만났다. 색소폰 연주자는 50대로 보이고 기타와 타악기 연주자들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연주 솜씨도 훌륭하고 서로 합도 잘 맞아 보였다. 세월이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들처럼 살면 어떨까라고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가볍고 흥겹다. 두 번째 곡을 들으며, 지갑에서 5유로를 꺼낸다. 보통 동전을 꺼냈었는데 오늘은 왠지 그게 맞을 거 같아서. 카를교에서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해 준 대가보다는 훌륭한 음악과 여유 있는 표정을 보는 잊을 수 없는 경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황금소로를 비롯, 카프카가 늘 걸어 다녔을 길을 지나쳤다. 오늘도 많이 걸었다. 걸음에 새긴 기억은 오래간다. 오래가는 기억을 남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약간의 힘듦에 대한 보상은 음식으로 받아야 한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무런 계획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걷는 여행의 묘미, 꼭 어딘가를 막 다니고 시간을 쫓기듯이 다 봐야 되는 건 아니니까 걷다가 힘들면 쉬고 쉬다가 좋아지면 다시 걷고.... 숙소에서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보상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Meet Beer로 내려갔다.


뭔가 없어 보이면 안 될 거 같아 사람 수대로 메인 요리를 주문하던 오랜 관성에서 벗어나, 사이드메뉴를 잔뜩 주문했다. 구운 채소는 어제와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한다. 식재료가 어제와 같은 식재료가 아니고 새롭게 대지에서 탄생한 식재료들이니 다를 수밖에. 양배추 당근 초절임은 시큼하면서도 싱싱한 채소의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쪽파를 곁들인 으깬 감자는 그 질감이 흩어지지 않고 알알이 느껴져서 한 접시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음식이 명령을 내리면 몸이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순리이고 흐름이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입안에서 벌어지는 음식 대 미각수용체의 협력과정을 지켜본다.


채소를 다루는 솜씨와 식재료의 조합, 은은한 소스에 이르기까지 가성비 높고 훌륭한 식사를 하고 난 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이번 프라하 여행의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다시 보내는 것이다. 미리 예약을 해두면서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주인장의 표정이 이해된다. 같은 식당에서 매일....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와 마주한다. 숙소 바로 앞에 필스너 우르겔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테이블 하나가 남아있었다. 어제의 경험이 교훈이 되어 미리 카드가 되냐고 물어본다. Only Cash!!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No Card를 외치던 일본의 가게들이 떠오른다.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세금과 복잡한 이슈를 싫어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ATM에서 현금을 찾았다. 6천 원의 수수료를 지불하고도 만족스러워할 만큼 진하고 깔끔하고 명쾌한 라거의 맛은 필스너가 아니라 이 지역 생맥주다. 앞 테이블에 등산복 차림의 동네 친구들 네 사람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근처에 등산을 할만한 곳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진지한 표정들과 함께 프라하의 밤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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