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_chapter 1]
”진규, 얼굴 많이 탔네? 에티오피아 재밌었어?”
“그럼~. 완전 장난 아니었지.”
오랜만에 친구들은 새까맣게 그을린 내 얼굴보다 에티오피아 이야기를 더 궁금해했다. 나는 한 동안 이곳저곳 다니며 신나게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로 숨 막히게 더웠던 날씨 이야기부터 굳은살 박힌 손으로 곡괭이 한 자루 쥐고 간이 저수지와 농구 코트를 일궈낸 이야기, 전기가 없어 불을 켤 수 없는 학교에 풍력발전기를 세워준 이야기까지.
하지만 내 입술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었다. 신나게 웃음을 나누는 내 마음 한편에는, 팔뚝에서 고름을 뚝뚝 떨어뜨리며 봉사센터의 문을 두드렸던 젊은 아저씨의 모습이 마른 강바닥처럼 깊게 파인 채 남아 있었다.
“여기가 봉사센터가 맞습니까? 여기서 치료도 되나요?”
“네. 맞습니다. 어떻게 오셨나요?”
“저는 앞마을에서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일주일 전에 일하다가 팔을 조금 긁혔는데 괜찮겠지 싶어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근데 점점 심해지더니 어제부터 열이 나고 너무 아파서 찾아왔습니다.”
나는 누런 고름을 닦아 내고 소독약을 발라 붕대로 팔을 감싸드렸다. 다행히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처음 다쳤을 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가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아저씨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떠나갔지만, 그 뒷모습이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다. 병이 더 심해지기 전에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질병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의료기기를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났다.
특히 의료시설이 드문 오지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밤새워가며 공부해 왔던 공학 지식으로 아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아직 미숙한 나지만,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할 수 있다는 상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당신이 준비되었을 때 스승은 저절로 나타난다.’
언젠가 본 영국 격언이다. 마침 서울대학교의 한 의료기기 연구실에 친한 선배가 입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곳은 휘어지는 전자소자를 개발하는 연구시설로, 국내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 연구실에서 배운 기술로 건강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센서를 만들어 환자들을 돕고 싶었다. 티 내지 않아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학교 이름도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교수님 꼭 연구실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진규 너는 왜 연구를 하고 싶은 거니?”
“음... 제가 에티오피아에서... 의료기기를...”
“아니, 그거 말고. 6년은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야. 네가 연구하고 싶은 진짜 이유가 뭐야?”
“...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욕만 앞섰고, 알맹이는 여전히 설익었다. 푸르뎅뎅한 색깔의 감처럼,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에 떫은맛이 퍼지는 미숙함 그대로였다. 나는 교수님의 예리한 질문에 한 마디 대답도 이어갈 수 없었다. 내실을 다져야 했다. 감상에 젖어 가슴 뜨거워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뒷받침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그날 이후, 도서관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틈만 나면 논문을 뒤적이며 전공서적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에 자신감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농밀하게 보낸 시간의 결실은 학부 연구 최우수상이라는 열매로 돌아왔다. 졸업학기에 가장 높은 학점을 거머쥐기도 했다. 무슨 일이든 내 의지와 능력으로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점차 단단해졌다.
“그동안 많이 생각해 봤어?”
“네 교수님,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좋은 논문 많이 쓰고 싶습니다.”
그랬다. 나는 여전히 욕심이 많았다. 반장 아벨과 나눴던 눈물 젖은 마지막 인사, 그리고 팔 다친 아저씨 이야기, 모두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었다. 솔직히 인정하건대, 나는 성공하고 싶었다. 그럴듯한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거머쥐고 탄탄한 인맥을 쌓아 돈과 명예 모두를 움켜쥐고 싶었다. 그것이 성공이라고 굳게 믿었다.
죄책감은 없었다. 나는 그런 삶을 살 자격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숨 돌릴 틈 없이 달려왔다. 남들이 웃고 떠들 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쉴 때도 경험을 쌓았다. 브레이크 없이 빠르게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이었지만, 괜찮았다. 목표를 내 힘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이 즐거웠으니까. 남보다 앞서 간다는 우월감이 달콤했으니까.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연구실 인턴부터 시작했다. 사무실에 자리를 배정받고 선배들과 인사를 나눴다. 실험실 청소부터 실험 기기 사용법, 자세한 실험 방법까지 하나씩 익혀나갔다.
조금은 익숙하다고 느껴지던 일주일째 되던 그날,
나를 태우고 쉼 없이 달리던 롤러코스터는 갑자기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