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_chapter 1]

by 이진규


깊은 잠에서 일어나 보니 낯선 하얀 천장만 보였다.

‘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어제 나는 분명 연구실 신입생 환영회 회식자리에 있었다. 들뜬 분위기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기를 몇 번이던가. 완전히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갔던 순간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딱딱한 침대와 흰 커튼, 그리고 소독약 냄새가 배어있는 음산한 분위기, 여긴 분명 내 집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집에 와 있는 걸까?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부끄러운 흑역사를 만들기라도 한 걸까?


양손으로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지갑과 휴대폰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주머니가 없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바지를 내려다봤다. 난생처음 보는 하얗고 펑퍼짐한 환자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인기척이 들렸는지 옆자리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좁은 틈으로 커튼을 살짝 열어 쳐다봤다.


엄마다.


간이침대에 쪼그린 자세로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공포.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X 됐다.’


불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몸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힘을 주고는 있는데도 내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몸을 일으키기를 포기하고 조심스레 엄마를 불렀다.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희미한 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음... 마...’


희미한 소리에도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나를 품에 안았다.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달콤한 엄마의 살결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엄마 품은 언제나처럼 포근했다.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 바닥을 질질 끌며 어떻게든 걸어보려 했지만, 자꾸만 왼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병실 안 화장실을 향해 나아갔다.


미친 듯이 쿵쾅대던 가슴이 거울 앞에서 순간 멈췄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거울 속 나는 빡빡 깎은 머리 위로 선명한 수술자국이 드러나 있었고, 한쪽 눈은 굳게 감긴 채, 풍선처럼 부푼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힘 없이 늘어진 왼쪽 팔과 다리는 마치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낯선 환자가 거울 속에서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설마...’


꿈이다. 그래, 악몽이다. 당장이라도 깨어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꿈일 뿐이다. 혀를 세게 깨물어보고, 볼을 꼬집어봐도 거울 속 환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누구라도 말해줬으면 했다. 단지 어제 술을 많이 마셨을 뿐인데, 살면서 그렇게 큰 잘못을 한 적도 없는데, 억울하다.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는 현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았다. 양 볼에는 빵빵하게 바람을 넣어보고, 두 발로 힘껏 뛰어오르기도 해 봤다. 하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고, 오른쪽 볼에는 바람이 채워지지 않았으며 뛰어오르기는커녕 변기를 붙잡고 겨우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점차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화장실의 차가운 타일과 스산한 공기가 갑자기 낯설고 무서웠다. 한순간에 달라져 버린 내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에 찼던 미래의 모습이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껏 그려왔던 멋진 삶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변기에 몸을 기대어 걸터앉은 채,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는 하얀 눈송이들이 무심하게 내려앉고 있었고, 벽에 걸린 달력에는 빨간색으로 대문짝만 하게 ‘1월’이라 적혀있었다. 한겨울의 시작, 다른 이들에게는 새해의 희망이 시작되는 달이겠지만, 내게는 낯선 세계의 시작일 뿐이었다.


침대 옆 선반에는 내가 평소 매고 다니던 배낭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고, 그 옆 옷장에는 즐겨 입던 맨투맨과 패딩이 정갈하게 걸려있었다. 그래, 맞다. 연구실 출근할 때 항상 교복처럼 입고 챙기던 것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들은 내 일상의 일부였다.


눈을 천천히 감으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설렘에 뒤척이던 그 시간으로 흘러갔다. 그때의 나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있었고, 오늘 같은 미래를 마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병실의 고요 속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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