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ing to See the Unseen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

by 이진규

사람들은 종종 질문을 합니다. 궁금해서라기보다, 상대가 곤란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던지는 질문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무리가 그런 질문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믿기 어렵다며, 일부러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물었습니다.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하게 되었다면, 만약 다시 사는 세상이 있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질문이지만, 사실은 상대의 말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장난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듣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문제는 질문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고요. 사람들은 부활 이후의 삶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 살아가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도 결국 지금의 기준으로만 상상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나님이라고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그 말은 생명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다는 뜻이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논리로 이기려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좁은 생각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 : 23~33 부활과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 바른 신앙)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바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을 배워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 그것이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요즘 그 말을 자주 떠올립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학부생은 자신의 전공을 완전히 깨우쳤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생이 되면 자신이 아는 것이 극히 일부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을 때쯤 그 일부의 발톱만큼 알게 되었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교수라고 불러줄 때 겨우 발톱의 때만큼 이해했음을 고백한다고 합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입장에서 뼈저리게 와닿습니다. 저는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진료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는 데 다음 날 시험을 보는 기분입니다. 문제는 유치원생 수준 문제부터 대학생 수준까지 뒤섞여 있습니다. 심지어 한 문제 안에서도 새끼문제 난이도도 제각각입니다. 허리 아픈 사람은 어깨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아플 때가 많습니다. 구구절절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저는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르면 배워야 합니다. 보려고 애써야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애써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어느 날 떠졌던 제 오른쪽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