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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제비 Dec 29. 2023

감사일기 23.12.29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며칠 전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썼다. 아무리 정이 들고 친해져도 목적이 분명한 조직에 속한 개개인의 관계는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다고. 그래서 동료들에게 너무 많은 정을 줄 필요는 없다고. 일을 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만 유지해도 괜찮다고.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느꼈다. 물론 조직생활의 특성상 형식적이고 이해타산적인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10년이 넘도록 한 회사에서 일을 하며 참 많은 사람을 보았다. 남을 때리는 사람, 하루도 빠짐없이 욕을 하는 사람, 근태가 제멋대로인 사람,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 채 살아가는 사람 등. 최소한의 상식을 가졌다는 전제하에 개인적으로 가장 함께하기 힘든 유형 중 하나는 '업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바로 그 '민폐남'이 되었다.


어제 오전에 시간에 쫓기며 가맹점에 필요한 주문을 등록하고 있었다. 100개가 넘는 점포에 각각 주문을 입력하기 위해 엑셀시트를 열어 숫자를 입력해 나갔다. 그 와중에 떨어지는 다른 일들을 동시에 하다 보니 집중이 되지 않고 조급함만 더 커져갔다.


팀원 두 명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문 등록을 마쳤다. 다음날 팀원 중 한 명이 거래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왜 주문하지도 않은 물건이 배송된 거죠?"


배송이 잘못 갔는가 하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양이 간 곳도 있었다. 어제 주문을 수정하고 입력했던 순간들을 복기하며 어디에서 어떻게 오류가 생겼는지 확인했지만 좀처럼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두 점포의 주문 오류가 아닌, 전체적으로 발주가 잘못 들어간 것 같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최종적으로 내 잘못이 아님을 확인했지만, 후임들과 함께 일을 하며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더구나 어려운 일도 아니고 루틴 한 업무 중 하나였는데. 물론 시간에 쫓기며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하고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업무 미스였다.


업무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런 만큼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 관심을 갖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다. 10년이 넘도록 일을 하면서 이런 실수를 한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인데. 모든 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로 인해 거래처 사장님들에게 계속 연락을 받고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는 1년 후배를 보니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내가 똑바로 확인하지 못했어."


팀장과 팀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사과했다. 어찌 됐든 끝까지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힘들게 발주 리스트를 만들어 보내준 후임에게 미안했다.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아 너무 화가 났다. 다른 팀원들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만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동료끼리 미안할 거 없습니다."


뭐가 그리 미안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초조해하며 초점 없는 눈으로 줄담배를 피우던 녀석이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살짝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욕을 먹고 상황을 마무리해야 하는 것만큼 힘들고 화가 나는 상황도 없다. 그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후임의 마음이 어떨지 잘 알고 있었다.


후임은 분명히 당황스럽고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찌질한 나처럼 소리를 지르며 원망하고 화를 표출하는 대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미안할 거 없다고 나에게 분명히 말해주었다. 내가 또 다른 실수를 한다 해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이 녀석은 진국이다. 업무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매력 있는 캐릭터이다.  


다음에는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올해 마지막 업무가 엉망이 될 뻔했는데, 덕분에 잘 추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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