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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제비 Feb 18. 2024

코인노래방은 못 참지


하루의 절반을 일터에서 보낸다. 일하는 내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지만 막상 퇴근을 하면 남아있는 에너지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바로 잠자리에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없고 일만 존재하는 삶이라니, 너무 비극적이다.


퇴근 이후의 즐거운 일상은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휴식을 취하거나 가벼운 취미활동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날이 있다. 괜스레 울적한 날, 평소보다 충만한 감성을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은 날, 기쁘거나 슬픈 날.


이럴 때 나는 애연가들이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듯 코인노래방을 간절하게 찾는다.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막 가지는 않는다. 20년이 넘도록 코인노래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나름의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접근성이다. 원할 때 언제든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걸어서 갈만 한 거리에 코인노래방이 있어야 한다. 걸어서 5분 이내, 최대 10분이 마지노선이다.


둘째, 깔끔해야 한다. 예전 (2000년대 초반) 오락실 안에 있던 노래방과는 달리, 요즘 코인노래방은 대부분 깔끔하다. 하지만 관리가 안 되는 곳도 간혹 있는데 이런 곳은 대번에 티가 난다. 문을 열었을 때 소파나 테이블에 쓰레기가 있거나 마이크가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을 경우, 그런 곳은 과감하게 패스한다.


셋째, 장비상태도 중요하다. 오래된 장비를 사용하거나 장비 상태가 좋이 않을 경우 영상과 음향을 통해 얻는 만족감에 차이가 생긴다. 특히 마이크의 성능이 좋을수록 부족한 가창력이 커버되는 듯한 착시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가격이다. 웬만한 코인노래방은 대부분 천 원에 3곡을 부를 수 있다. 20년 전 대학생일 때 천 원에 4~5곡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도 여전히 착한 가격이라 생각한다. 만약 천 원에 2곡만 부를 수 있는 곳이라면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요즘 코인노래방 클라스 ⓒ락휴 홈페이지



며칠 전 녹초가 된 몸으로 잠을 자려고 누워있을 때였다. 불현듯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였다. 자고 싶은 마음과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서로 싸우고 있었다.


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욕구가 승리했다. 아무렇게나 잠바를 걸쳐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딱 6곡만 부르고 올 생각으로 신발을 신었다.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에 지갑을 두고 온 것이었다. 이런!


코인노래방은 대부분 현금으로 결제하는 방식이다. 삼성페이는 만능 결제수단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포기를 하긴 일렀다. 검색을 해보니 삼성페이로 현금인출기에서 출금이 가능하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삼성페이로 현금인출이 가능한 은행은 내가 거래하는 곳들이 아니었던 것. 깔끔하게 포기를 해야 할 터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지인과 통화를 하며 결국 코인노래방을 가지 못하게 된 처지를 말하자, 지인은 뜬금없이 주위에 국민은행이 있느냐고 물었다. 바로 옆에 있다는 내 말에 지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다시 나가!!"


알고 보니 국민은행에는 '리브 ATM'이라는 기능이 있는데, 카드 없이 통장번호와 출금인증번호만 있으면 출금이 가능한 서비스였다. 평소 내가 코인노래방을 자주 가고 노래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나보다 더 애가 탔던 지인은 나를 국민은행 ATM으로 이끌었고, 결국 나는 소중한 1만 원을 출금할 수 있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코인 노래방은 3층이다. 문을 연 뒤 정면 카운터에 있는 사장님과 간단히 눈인사를 한 다음, 마이크 커버를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1분 정도 무슨 노래를 부를지 고민한 뒤 빳빳한 천 원 지폐 한 장을 넣었다. 그날 부른 곡은 노을의 '전부 너였다'와 '늦은 밤 너의 집 앞에서'였다. 안타깝게도 충만한 감성만큼 가창력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3곡쯤 불렀을까. 좋지 않은 컨디션과 집중력 저하로 자꾸만 목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일정한 강도로 음정에 맞게 가사를 뱉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고수가 아닌 초보이다 보니 생각보다 어려웠다.


슬슬 목이 마르고 피곤함도 느껴졌다. 출근을 위해 더 이상 무리하지 말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옆방에서 애절한 노래가 들려왔다.


아직 혼자 남은 추억들만 안고 살아요

우리 함께 걷던 그 거리를 혼자 걸어요

혹시 걷다 보면 나를 찾는 그대를 만나

다시 그대와 사랑하게 될까 봐


아니, 야밤에 이런 주옥같은 명곡이라니... 그런데 이 분 노래 좀 치는데? 평소 남자키로 자주 부르던 거미의 노래를 들으니 쪼그라들었던 감성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천 원을 한 장 더 꺼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정이 다가올 때까지 각자의 방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래가 고플 때는 불러줘야 한다. ⓒ손수제비



노래에 진심인 나는 내가 부르는 것들을 자주 녹음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색하고 유쾌한 일도 아니지만, 몇 번 듣다 보면 개선할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호흡이 얕았구나, 여기는 힘이 너무 들어갔구나, 여긴 발음이 새네, 여기는 음정이 부정확했네라고 하며 셀프 레슨을 진행하기도 한다.


좋지 않은 목상태였지만 그날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어보니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힘들게 나가서 불렀던 보람이 느껴졌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노래를 부를 때는 영 별로인 것 같지만 녹음한 파일을 들어보면 제법 좋을 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지인과 혼자 외롭지 않도록 옆방에서 함께 열창해 준 누나(?)에게 새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그날 밤의 완창은 불가능했을 테니.


가끔 별것 아닌 작은 일상을 통해 삶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매일의 삶이 죽을 만큼 힘들기 때문에 어쩌면 소소한 것에서 더 큰 기쁨을 발견하는 게 아닐까. 덕분에 오늘도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고맙다, 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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