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수제비 Feb 07. 2024

귤이 한 빡스에 오천 원예

사지 않고서는 못 배길걸

군것질을 좋아한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최근 간식에 소홀했는데,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던 중 어묵을 팔고 있는 리어카를 발견했다. 깜깜한 저녁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파와 무시의 숨결을 머금은 멸치다신물의 깊은 향이 나를 붙잡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허겁지겁 어묵을 먹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작은 종지에 간장을 덜어 앞에 두고 후후 불어가며 맛을 음미해 가면서 천천히 먹고 있었다. 어묵은 1개 700원, 3개 2,000원이었다. 들어가서 저녁을 먹어야 하니 가볍게 6개만 먹기로 했다.


어묵 리어카 바로 옆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과일을 잔뜩 늘어놓고 판매 중이었다. 어묵을 먹는 내내 과일 파는 아주머니의 우렁차고도 반복적인 멘트가 이어졌다.


"귤이 한 빡스에 오천 원예." (오천 원입니다)


잊을만하면 멘트가 반복되었다. 대략 10초에 한 번씩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우렁차고도 절도 있는 목소리였는데, 어묵을 먹는 내내 과일가게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내가 어묵을 먹는 것인지 귤을 먹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였다.


어묵을 먹으면서도 내 눈은 자연스레 과일가게를 향했다. 길바닥에 이것저것 다양한 종류의 과일들이 있었다. 청송사과, 배, 귤 등 큼직한 과일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여러 종류의 과일 중에서 유독 귤만 계속 강조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귤을 완판 하고야 말겠다는 아주머니의 확고한 결의가 느껴졌다.


수 십 번쯤 들었을까.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귤을 좋아해서 지난주에도 아파트 장터에서 귤을 사줬었다. 한 봉다리에 몇 개 안 들었던 게 만 원이나 해서 내가 사장님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몇 개 없는데 와이래 비쌉니까?"

"요새 귤이 끝물입니다. 그래서 비싸요."


사장님은 하우스 밀감이 어떻고 하면서 현재 제주 감귤농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결론은 귤이 지금 비싸다는 것이었다.


지난주에는 작은 비닐 한 봉다리에 만 원이었는데, 이번 주에는 한 빡스에 오천 원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과일가게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귤 확실히 맛있는 거 맞습니까?"


아주머니는 내가 어묵을 먹을 때부터 귤을 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말에 '한 빡스에 오천 원예'라는 (질문과는 상관없는) 우렁찬 기합을 다시 한번 토해낸 뒤, 귤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박스 안의 귤을 비닐로 옮겨 닮고 있었다.


아차, 현금이 없었다. 아주머니에게 계좌이체가 가능한지 묻는 순간, 장사 하루 이틀하냐는 표정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손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휴대용 카드단말기가 위풍당당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귤 한 빡스(포장은 비닐에 해주었다)를 사들고 퇴근했다. 주먹만 한 귤이 제법 많이 들어있었다. 개중에는 상한 녀석들도 일부 있었지만, 가격은 확실히 착한 편이었다. 문제는 맛인데.. 하나를 냅다 까서 입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다소 투박한 외형과는 달리 귤은 무척 달고 맛있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원하게 먹으면 훨씬 더 맛있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길거리 어묵에 이어 착한 가격에 귤 한 빡스를 득템 하다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맛있는 귤을 먹으니 자연스레 부산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났다. 업무차 자주 지나가는 곳이라 조만간에 또 들를 예정이다. 아마도 귤은 소진이 완료되었을 터이니, 다음번에는 다른 과일에 도전해 봐야겠다. 집에 있는 가족들 것까지 넉넉하게 사 와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