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나와는 거리가 있는 단어들이다. 며칠 전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좀 더 가져도 돼."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누군가는 나에게 '지나치게 겸손하다'라고 했다. 겸손한'척'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딱히 잘났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 뿐인데.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보니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면서 다양한 피드백을 받는다. 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부터 글이 좋았다는 칭찬,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는 말까지 많은 반응들을 본다. 평소처럼 쓴 글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의 힘에 의해 수 만 명에게 읽히기라도 할 때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꿈틀대는 것 같다.
'이거.. 내 글이 좀 먹히는데?'
부정적인 반응보다 긍정적인 반응이 늘어나면서 글쓰기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다.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하니까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나도 모르게 '정말로 글을 잘 쓰는 것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좋든 싫든 반응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볍고 편하지만은 않다.
글 쓰는 게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내가 쓴 글이 평가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삶들이 비교와 경쟁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었지만, 글쓰기만큼은 무엇을 쓰든, 어떻게 표현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옮길 수 있었던 것.
그런데 내가 쓴 글이 뜻하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때로는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기도 하면서, 기존에 없었던 마음이 하나둘씩 꿈틀대며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이번 글에는 왜 좋아요가 이것밖에 달리지 않는 거야?'
'이 정도면 글쓰기 고수가 쓴 글의 느낌이 날까?'
'왜 글에 대한 (매체의) 평가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남이 쓴 글을 보며 제멋대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별로 잘 쓴 글이 아닌 것 같지만 뜨거운 호응을 받은 글, 별 내용이 없어 보이지만 매체의 최우수 평가를 받은 글,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팔로워 수로 인해 매번 '인기글'에 선정되는 듯한 글을 볼 때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들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라며 다른 사람의 글을 폄하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글쓰기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쓰는 것이 좋았다고 하면서 스스로 글쓰기의 장점을 없애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음속에 시커먼 뭔가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냈다. 내가 남들보다 글을 더 잘 쓴다는 근거 없는 착각은 글쓰기를 즐거움이 아닌 부담으로 만들었다. 그냥 쓰면 되는데 문장 하나를 쓸 때도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스스로를 검열하고 다그쳤다.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에 집착하는 것도 문제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반응을 보이면 좋겠는데, 좋아요가 많이 달렸으면 좋겠는데'따위의 생각을 종종 했다. 글의 내용과 본질보다는 글 이외의 것들에 신경을 쓰면서 사유가 쪼그라들었다.
얼마 전 매체로부터 청탁을 받았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만, 어느덧 우쭐대는듯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것 봐. 글이 형편없으면 매체에서 글을 써달라고 요청을 하겠어?'
청탁은 기본적으로 주제와 마감이 정해져 있다. 주제는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최근 일이 많은 상황이라 사실 걱정이 되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마감기한에 위기감을 느끼며 급하게 초고를 썼다. 써놓고 보니 글에 대한 확신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친구에게 글을 보여주니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여. 겉핥기식의 글로 보일 수 있을 것 같아."
부끄러웠고, 후회되었다. 글을 쓰기는커녕 업무를 처내기도 벅찬 상황에서 청탁을 덥석 받은 건 오만하고 경솔한 행동이었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자세도, 마음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송고를 위해서는 글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했다. 목요일이 마감이니 화요일까지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인사발령과 각종 이슈로 거짓말처럼 3일 내내 새벽 1시가 넘어 퇴근을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조급한 마음으로 늦은 새벽에 노트북을 펼쳤지만, 피곤한 몸으로 제대로 퇴고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글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못해 송고버튼을 누르며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내가 쓴 글이 많은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에 대한 순전한 마음과 열정이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삶을 돌아보고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글쓰기가 아닌 허울뿐인 글쓰기, 욕망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한다.
글을 쓸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돌아본다. 최소한 해야 할 일들을 제쳐두고 글을 쓰는 것은 자제해야겠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도저도 아닌 글이 나올 때가 많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함을 알기에, 글을 써야 할 때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해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내 마음을 살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더라도 마음이 무겁고 불안정하다면, 억지로 글을 쓰기보다는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하는 등 다른 활동을 통해 마음을 먼저 다스리는 것이 우선임을 느낀다.
어쭙잖은 필력을 당장 뜯어고치기는 힘들겠지만, 글쓰기를 향한 태도와 마음만큼은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글쓰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글쓰기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잘 쓰인 글보다는 삶이 뒷받침되는 그런 글을 써나가고 싶다.
조급함을 버리자. 끼적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