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은 대부분의 부모가 호강하는 날이었다. 이날만큼은 너도 나도 효자 효녀가 되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마음을 가득 담은 카네이션과 손 편지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사랑의 말을 건네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버이날이 지나고 나면 다시 일상이 찾아왔다. 사람들의 평소처럼 분주한 삶의 모습 속에서 '어버이날 특수'의 유효기간은 고작 하루가 채 되지 않음을 느꼈다. 빛나는 하루 뒤에는 무덤덤한 364일이 있었다. 어떤 날의 감동이 유달시리 크다는 것은 평소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이겠지.
어린 마음에 왜 굳이 어버이날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에 잘하면 될 것을, 곧 시들어 버려질 카네이션을 사느라 분주했던 손들을 기억 한다. 꽃을 건네기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효도포인트'라도 적립되는 것이었을까?
어릴 때부터 크게 말썽을 피우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내 기준에서- 부모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돈을 많이 달라고 하지 않았고 음식을 가리지도 않았다. 부모가 시키는 것에 대부분 순종했으며,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학업에도 나름 충실했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니며 졸업과 동시에 취직,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았다. 이 정도면 나이스하지는 않더라도 평타는 친 삶이 아닐까.
없는 형편에 매번 형식적으로 선물을 사는 것도 싫었다. 카네이션보다, 형식적인선물보다 용돈을 드리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 무언가를 드리는 게 더 실용적이라 믿었다. 어버이날이 되면 모두가 크든 작든 부모님께 선물을 주다 보니, 미처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던 날에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어버이날이 싫다.
ⓒ 픽사베이
누구보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고 착하고 바른 아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큰 괴리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목숨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의 나는 약간의 용돈을 드릴 수 있을 뿐이다.
내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내 자녀를 위하는 만큼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들과 부모를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건강도, 시간도, 물질도, 나의 삶 전체도 내 자녀를 위해 줄 수 있지만, 부모를 위해 동일한 희생을 감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부모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내어주기만 하는 것 같다. 내가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이후에도 당신들에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결혼 후 10년이 넘도록 매주 부모님을 찾아뵙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나는 다른 자녀들에 비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했다. 자녀들과 함께 매주 양가 부모님과 보내는 시간이 축적되는 만큼 나의 효심과 도덕성도 더 두터워진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애써 시간을 내어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매주 양가 부모님 댁을 방문하며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는 것이 어렵다. 피곤에 지쳐 부모님 댁에 가면 누워있다가 돌아오기 일쑤다. 부모님의 허리가 굽어지고 주름이 더 깊어질수록 당신들을 향한 내 마음은 더 냉랭해져 간다. 이 모든 것을 고작 어버이날 하루로 퉁치려는 듯한 내 모습에 자책과 반성을 넘어서 환멸을 느낀다.
어버이날은 장모님을 미안하게 만든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받은 장모님께서 오늘 전화를 주셨다. 곧이어 "바쁜데 전화해서 미안하네"라는 말씀을 하신다. 매번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손주들에게 더 많이 베풀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뭐가 그리 미안한지 모를 장모님을 더 미안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어버이날이 자꾸만 원망스럽다.
때로는 부모님이 사랑과 애틋함보다는 부담과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신들의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무언가를 자꾸 해드려야 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그저 살아계신 것에 감사할 수도 있을 텐데. 얼마 안 되는 용돈과 선물을 드리기 전 갈대같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본다. 예쁜 꽃과 맛있는 식사와 오랜만에 드리는 용돈으로도 시커먼 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나는 앞으로도 어버이날이 싫을 것 같다.
ⓒ 픽셀
더 이상 눈앞이 아닌 기억 한 편에 있을 부모님을 떠올릴 미래의 나를 상상한다. 기억 속의 부모님을 대하는 내 마음은 어떠할까. 당신의 은혜와 사랑은 어버이날 선물 따위로 퉁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조차도 부담스러워했을 내 모습에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것 같다.
받은 만큼 되돌려드리지 못한 미안함의 크기만큼 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더 깊고 단단해질 것이다. 늙고 병들고 지쳐 하나 둘 기억을 잃어가며 마침내 당신들에게 받은 사랑마저 잊을까 봐 두렵다. 알츠하이머를 얻고 나 자신을 잃는 것보다, 당신들의 존재를 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끔찍하다.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지 못할까 봐, 눈을 마주하고 손을 잡은 채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지 못할까 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받기만 한 삶이 원망스러울 것 같다. 조금만 더 찾아뵐 걸, 조금만 더 안아드릴 걸, 핸드폰과 책이 아닌 당신들의 얼굴을 조금만 더 바라볼 걸 하는 애틋함과 그리움이 꽤나 오랫동안, 아마도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지속될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의 크기보다 당신들의 사랑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어버이날이 여전히 불편한 나이지만, 그런 나조차도 끌어안을 수 있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기에 참 다행이다. 늘 그랬듯 부족한 용돈으로는 당신들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기에, 어눌하고 서툰 마음을 글로써나마 부모님에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