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5월 얼룩소에 쓴 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을 포함해 총 476명의 탑승객이 타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여러 방송을 통해 퍼져 나갔으나 이는 오보였다. 그날 생존한 학생은 75명에 그쳤다. -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 다른 / 유가영 / p31
세월호 9주기가 지났다. 평소 세월호 참사 관련 기사를 잘 읽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 보도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기사와 함께 어김없이 딸려오는 댓글들에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관련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제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지겹습니다.
이태원도 그렇고.. 아니, 놀로간 게 무슨 벼슬임?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도 전부 챙겨주지 못하는 마당에.. 좀 그렇지 않나요?
아이들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 무리들, 역겹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을 반기지 않는 -혐오하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세월호특별법'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금전적으로 많은 보상을 요구하고, 대입과 관련해서 특혜를 요구하는 등 '한 몫' 건지려고 한다는것.
이러한 시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참사를 대가로 대입 특례를 요구한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참사 이후 저와 친구들은 모두 반쯤 넋이 나간 채 시간을 보냈고, 뭔가를 계산하거나 내 것을 챙기기에는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날 겪은 일들의 잔상을 떨쳐 내는 것, 순간순간 친구들의 부재를 느끼는 것,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길고 벅찼으니깐요. (62p)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 보다는, 편하고 익숙한 자신만의 렌즈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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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심각한 사건 사고 이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재경험을 통해 공포를 느끼며 일상 생활에 영향을 받는 정신적인 질환이다. 눈 앞에서 사랑하는 친구와 선생님을 잃은 아픔은 정신 질환으로, 자해를 하는 것으로, 끊임 없는 불안과 능력 저하로,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배가 기울어진 것처럼 방이 기울어져 보이기도 했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수시로 허무함이 찾아왔다. 한창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어울릴 시기였지만 수업 내용이 머리에 들러올리 만무했다.
몇몇 학생들은 헬기와 배를 통해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친구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찾아온 것은 친구들이 아닌 카메라 플래쉬였다. 기자들에게 학생들의 상태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문기사 1면에 실리게 될 특종 기사를 위해 치열하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아픔의 크기는 한계가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인간을 망가뜨리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깊은 상처와 씨름하던 생존자와 유족들에 대한 시선은 무관심과 불편함으로 변해간다. 남은자들은 어느덧 위로와 격려가 아닌, 불편한 짐짝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이 잘못 행동한 것 처럼.
나의 형제 자매가, 내 자녀가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나면 어떤 느낌일까. '어떻게든 살아내야지.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질 거야' 같은 말이 귀에 들리기는 할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를, 부모의 전부이자 우주 만물보다 더 소중한 자녀를 떠나 보낸 뒤, 일상을 정상적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것일까. 그런 이들을 비난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당시 저자의 집과 고등학교의 거리가 멀어 버스를 놓치거나 늦잠을 자면 택시를 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사 이후 택시를 타더라도 단원고라는 목적지를 말하지는 않았다. 단원고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쏟아지던 질문들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래서 단원고가 아닌, 인근에 위치한 [안산올림픽기념관]으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어느 날 기념관 앞에 도착한 한 택시기사는 요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당황한 그녀에게 기사 아저씨가 말했다.
단원고 학생이지? 내가 택시기사라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렇게 태워 주는 것밖에 없어서 그래. 힘내고 학교 잘 다녀라."
저자는 깊은 우울과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뉴질랜드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그 곳에서 집주인과의 트러블로 당장 머무를 곳이 없을 당시, 선뜻 자신의 집에 초대해준 케이트라는 친구도 있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던 친구의 집에 머물며 보낸 시간은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세월호 침몰 당시 의사였던 '김은지 원장'은 동료 의사들과 함께 단원고로 향했다.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현장에서 심리치료로 봉사하던 김은지 원장은, 이정도로는 아이들이 회복되기 힘들 것을 직감하고 학교에 계속 상주하며 국내 최초로 '스쿨닥터'가 된다.
이후 단원고에 지속적으로 상주하던 김원장은 마음건강센터의 운영이 중단되면서 학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복귀를 하는 대신 연고도 없는 안산에 병원을 차렸다. 세월호의 아픔을 끝까지 치유하고 싶다는 그녀는 병원 내에 소규모의 마음건강센터를 만들었다.
장래희망이 사서였다는 저자는 하루에 책을 10권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안장애가 심해졌다. 이후 자신에게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의 영향으로 '상처 입은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17살의 기억이 온전히 치유되지도, 잊혀지지도 않은 채 그것을 딛고 살아가는 그녀는 현재 '운디드 힐러'라는 비영리 단체에 속해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녀는 산불 피해로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강원도 주민들을 위로하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 연극 공연을 하며 치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세월호 참사는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었지만,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던 연대의 힘은 또 다른 운디드 힐러들을 만들어 냈다. 분열과 갈등이 가득한 세상에서 상처투성이인 누군가는 다른 사람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게 되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누군가의 삶을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은 쉽다. 누군가는 이제는 좀 그만하라고,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 것도 지겹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의사라는 직업을 그만둔 채 스쿨닥터가 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삶을 살아간다.
지금도 그녀는 꿈을 꾼다고 한다. 해일이 밀려오는 꿈, 나만 살아남아 괴로워하는 꿈,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꿈. 지워지지 않는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가진 17세의 소녀는 어느덧 26세가 되어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이 책은 죽음과 상처, 트라우마, 삶에 대한 의지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가 직접 쓴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 무척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서로 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