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얼룩소에 쓴 글입니다.
한 때 정유정의 책을 읽으며 헤어나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TV가 아니라 자극적인 영상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투박하고 거침 없이 써 내려간 문장들을 보면 온몸에 전율이 돋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밑도 끝도 없이 몰아치는 전개에 숨을 죽이며 읽다 보면 어느 새 끝이 나버린다.
'밝은 밤'을 읽으며 최은영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복싱에 비유하자면 정유정이 묵직한 인파이터라면, 최은영은 아웃복서 같은 느낌이다. 자신만의 호흡과 시간을 갖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며 독자들을 마음대로 요리(?) 한다. 굵직하고 큰 사건사고 중심의 내용 전개 보다는, 사람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만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녀의 책을 보면서 이때까지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묘사하는 섬세함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다. 효율적이고 직관적인 소통을 위해 텍스트가 사진과 영상으로 대체되는 시대이지만, 최은영이라는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사소한 마음의 변화나 울림 하나 하나에 집중하며 천천히, 담담하면서도 빠짐 없이 서사를 이어간다.
'내게 무해한 사람' 은 7개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인공들이 10~20대의 젊은 청춘들이다. 우정과 사랑, 상처, 아픔, 죽음을 대하는 온전하지는 않지만 날 것 그대로의 풋풋한 감정들을 마주하며 잠시 동안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글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저마다 각자의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글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마무리 된다. 저자는 문제와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담담하게 그려낸다.
사람은 내가 우선인 동물이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를 위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당사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최대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대로 재단한다. 그래서 나의 말과 행동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해롭고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 것이 좋은 의도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 조차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내가 하는 위로 자체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로를 받는 다는 것은 아픔과 상처를 전제로 한다. 만약 위로를 받는 대상이 아직 상처를 벗어나지 못했거나 상처를 직면하는 것이 두렵다면, 누군가의 어쭙잖은 위로는 상처를 다시 상기시키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정작 상대방은 괜찮은데, 상대방을 배려한답시고 (하지 않아도 될) 위로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불충분한 정보로 인한 문제도 있다. 친한 사이라서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여러 가지 -상처를 주는- 상황들은 상대방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저자는 상처를 받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 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고 한다. 어떠한 예술도 사람보다 더 앞설 수는 없지만, 작가 자신이 지닌 부족함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을지 두렵다고.
사서 친구가 '밝은 밤'을 빌려주면서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책을 다 읽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아끼고 또 아껴서 읽었다고. 나는 내심 '임마이거 좀 오바 아닌가' 생각 했지만, 200% 공감하며 미친 듯이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았다. 한 권을 다 읽으면서 만족감에 가슴이 차오르면서, 동시에 더 이상 읽을 페이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 작가를 발견하면, 다른 것을 제쳐두고 일단 그 사람의 책을 전부 읽어본다. 하지만 최은영이 쓴 책은 많지 않았다. 검색을 해보니 4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집에 있고 하나는 올해 초 친구에게 선물로 줬던 밝은 밤, 하나는 이번에 읽은 내게 무해한 사람이고 나머지 한 권은 아직 읽지 못했다. 뒤에 2권을 즉시 구매했다. 밝은 밤을 바로 사지 않은 이유는, 얼마 전에 구매해서 그런지 바로 다시 구매하기가 약간 억울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이처럼 맑고 깊은 눈으로 볼 수 있는지, 책을 다 읽은 뒤 재미있다는 느낌보다는 '개운하다'는 마음이 든다. 책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 p 209.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 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p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