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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망한 삶'에서 발견한 희망

김지연 소설 <조금 망한 사랑>을 읽고

by 손수제비

자본주의는 신비롭다. 가진 돈의 크기가 신분을 결정한다.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울과 지방, 아파트와 반지하에 이르기까지. 언뜻 이해가 안 되는 건 다수가 아닌 소수가 주인공이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이다. 사실 GDP의 증가와 관련된 사람들은 주인공이 아닌 이름 없는 단역인 경우가 많은데.


후자, 그러니까 절대다수인 비주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저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국민의 절반이 여성이지만 이들 대부분은 남성보다 급여를 적게 받는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강도는 세지만 실질임금은 갈수록 초라해진다. 표면적으로는 너도나도 초고령사회를 우려하지만 정작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IE003408058_STD.jpg ▲책 <조금 망한 사랑> 표지. ⓒ 문학동네



김지연의 소설 <조금 망한 사랑>(문학동네)은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상의 어려움을 겪는 저들의 삶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잠적해 버린 옛 애인의 이야기, 갚아야 할 빚을 체화한 반려빚이라는 이야기, 실제로는 산재가 발생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무재해'인 회사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여운이 남는 글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이다. 사별의 아픔을 겪은 삼촌과 철없는 조카가 함께 유자청을 담그며 조금씩 마음을 회복하는 모습이 잔잔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IE003408062_STD.jpg ▲조금 망한 사람들의 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더 감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픽사베이



삼촌이 재혼한 숙모는 나이가 많은 데다가 훌쩍 큰 아들까지 있는 여자였다. 조카는 이런 숙모를 못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숙모는 그런 조카를 자신이 어릴 때와 닮았다며 이뻐한다.


숙모와의 결합으로 누구보다 행복했던 삼촌의 삶은 불행히도 오래가지 못했다. 불의의 사고로 숙모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기 때문이다.


달달한 유자청은 쓰디쓴 상실의 아픔을 상기시킨다. 괴로워하는 삼촌을 볼 때마다 조카는 자연스럽게 숙모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숙모를.


누군가를 온전히 좋아하거나, 혹은 미워하는 마음조차 그 대상이 살아있을 때라야 온전해질 수 있음을 새삼 느낀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힘든 직장생활을 힘들어하는 K, 결혼 생활이 마음 같지 않다는 T, 소중한 사람을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S,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몸도 마음도 궁핍해진 J.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 하나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는 없었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극심한 번아웃으로 휴직 이후 복직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하루하루가 쉽지 않다. 약이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고 정신적인 피폐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간다. 독서와 글쓰기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제목이 너무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임팩트가 있거나 별다른 특색이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하지만 나와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을 그려낸 '조금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많은 공감이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앞만 보며 달려가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한번 이 책의 제목인 <조금 망한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6개의 음절 중에서 특별히 '조금'이라는 단어에 애착이 간다. 나 또한 이번 생은 망했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삶 전체가 망한 것은 아니니까. 책 속 인물들의 삶에 공감하면서도 무기력함이나 두려움이 아닌 한 줄기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조금 망한 삶'을 다르게 표현하면 '조금은 성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망한 현실에 매몰되기보다는 그것이 '조금'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무너지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한 줌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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