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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업가 임진하 Mar 02. 2020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

101년 전 3월 1일,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잊지 말고 감사하자

가끔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나라의 소중함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가 고등학교 이후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그러나 역사 관련 TV 프로그램과, 역사 관련 영화를 보고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내가 누리는 행복과 자유, 권리들은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 후손들에게 더 좋은 대한민국과 지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1년 전 3월 1일,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3.1 운동의 배경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독립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첫 번째 운동이었다.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당해온 조선에 1919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국내적으로 국외적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 민족 자결주의 등장 -

민족 자결주의란 약소 민족들이 스스로 독립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으로 러시아와 미국 등 강대국에서 이러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우리가 독립의지가 강하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려야 하는 것의 필요성을 느꼈다. 


- 고종 황제의 죽음 -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종 황제의 독살설이 돌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대한 반감이 커질 무렵, 고종 황제의 독살설은 백성들에게 큰 분노를 안겨주는 도화선 같은 사건이 되었다. 



3.1 운동의 진행

- 민족대표 33인과 학생들 -

3.1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민족대표 33인과 어린 학생들이었다. 1919년 2월 8일 이광수,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 어린 학생들이 일본에서 독립선언을 외친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민족대표들은 이 사건을 부끄럽게 여겨, 어른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 기미독립선언서와 탑골공원 -

독립운동을 위해 민족 대표는 낭독을 하고 백성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독립선언서를 만들게 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으며, 왜 조선이 독립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 독립선언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은 독립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식민지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기미독립선언서

시기는 3월 1일, 장소는 탑골공원으로 결정하였다. 3월 3일은 세상을 떠난 고종황제의 장례식 이므로 반대하였고, 3월 2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반대를 하여 3월 1일 토요일로 날짜를 정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탑골공원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 낭독은 민족대표가, 학생들은 출력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 주기로 하였다.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통해 우리의 뜻이 왜곡되거나, 테러처럼 비치지 않게 하였다. 


- 3월 1일, 영웅 유관순 열사의 등장 - 

3월 1일 당일, 탑골공원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자칫 폭력투쟁이 될 것을 우려하여 당일 날, 철수하게 되었다. 민족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던 학생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민족대표의 뜻에 따라서 철수를 할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3.1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

그 순간, 한 학생이 단상 위에 올라가 기미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학생의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 학생은 당시 18세 나이로 이화학당에 재학하고 있었던 유관순 열사였다. 사람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일제에 억압에 대한 분노와, 학생들의 용기에 감동하여, 대한독립의 의지가 강렬히 샘솟기 시작했다. 


- 2차 독립운동과 일본의 살상-

3월 1일 독립운동은 일본의 무자비한 살상과 폭력으로 마무리되게 된다. 평화적인 비폭력 집회였지만, 일본은 폭력으로 집회를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전국적으로 이 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맹휴학을 하고,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리기 시작했다. 이를 2차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용기에 감동한 어른들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선언한 독립선언서를 읽으며, 독립의 의지를 같이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차별적인 살상과 폭력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 헌병에게 항의를 하다, 유관순 열사가 보는 자리에서 일본 헌병의 총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유관순 열사는 피눈물을 흘리며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3.1 운동의 영향

3.1 운동은 실패한 독립운동이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3.1 운동을 통해 다양한 활동이 일어날 수 있었고, 3.1 운동은 독립운동의 시작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계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3.1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 일제 통치 방식의 변화 -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적 시위로 우리나라의 독립의지가 세계로 알려졌고,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한 일본에 대한 비난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은 세계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통치의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꾸게 되었다. 


-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 -

3.1 운동은 1920년대 이후 활발해진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20년대부터 우리 민족은 국내적 사회, 경제, 문화적 민족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국외적으로는 다양한 외교 활동, 의거 활동,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도 3.1 운동 이후 1919년도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 -

3.1 운동을 보고 해외의 약소 민족들도 독립운동을 진행하게 되었다. 인도의 '무저항 비폭력 주의 운동',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3.1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주었던 운동이었다. 



마치며 

3.1절을 기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한 분들에게 감사하며, 잊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와 행복은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임을 알고, 올바른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본인의 삶, 행복을 포기하며 우리에게 값진 선물을 남겨주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도록 비극적인 역사를 바로 알고 올바른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조상에게 감사를 표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잦은 외세 침략으로 인해, 단결의 DNA, 의지의 DNA가 잠재되어있다. 항상 우리에게 위기와 혼란이 찾아올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위기라 생각한다. 위기를 잘 극복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자. 우리 안의 잠재되어 있는 단결과 의지의 DNA를 다시 한번 발휘하자. 


이 글은 설민석 선생님의 3.1절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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