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첫 기억
2010년 겨울, 철없던 대학생이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여행은 내가 계획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공공교육을 맹목적으로 받아와 휴학이란 시스템에 반해 있었던 대학교 3학년이었다. 아직 한 번도 휴학해 보지 못한 대학생이었다. 그 상황에서 친구 K가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간다는 소리에 나는 K가 부러웠다. 부러워했던 이유는 그녀가 공부가 목적이 아닌 놀 목적으로 일본을 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K는 달콤한 술로 날 꼬셨다.
너가 휴학하고 일본 오면, 이자카야에서 술 마시고. 캬하.
죽이 됐든 뭐가 됐든 얘랑은 술 마시러 일본에 가고 싶다. 아니, 가야 한다! 미친 생각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즉흥의 아이콘, 내가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조심스레 휴학 이야기를 꺼냈다.
친언니는 나보다 4살 많았다. 내가 대학생일 때 언니는 직장인이었다. 우리 자매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 가끔 언니 옷을 몰래 대여(?)하고는 잔소리 듣는 딱 그 정도 사이였다. 또한 언니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을 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거라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정확히 언제쯤인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언니가 충분히 고민을 하고 내린 결론이라 여기며 ‘알았다.’라는 한 마디만 했었다.
그때 휴학을 이야기하면 안 되었었다. 아니, 이야기하길 잘한 것인가.
언니가 퇴직하고 세계여행하고 싶다며 부모님께 이야기했다. 누구랑 갈 것이냐, 얼마큼 다녀올 것이냐 등 부모님의 관심은 언니한테 쏠려 있었다.
“누구 같이 갈 사람이 있고?”
“아뇨, 저 혼자 가려구요.”
“얼마큼?”
“한 1년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돈은 있어?”
“일하면서 저축한 게 있어서 괜찮아요.”
“저...기? 나도 휴학할 건데.”
“...넌 휴학해서 뭐 할 건데?”
“K 따라서 일본 가려구?”
부모님은 다음날 나와 언니를 거실로 불렀다. 그리고 날 데리고 가라고 언니에게 임무를 주었다. 내가 쓰는 돈은 엄빠가 지원해 준다는 것이었다. 언니 혼자 세계로 보내는 것보다 둘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제안한 것이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언니한테는 제안으로 안 들렸을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에서 K와 술 마시는 계획 말고는 내세울 포부가 없었다. 워킹홀리데이를 한다든가, 어학연수를 간다든가 등 그럴싸한 휴학 계획이 없었다. 정말 오직 술을 위한 일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여행 경비를 지원해 준다는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그러나 여행에 돌아왔을 때 날 기다렸던 건 여행 다니면서 사용했던 카드 명세서였다.) 난 결국 OK를 외쳤고, 2010년 12월 22일, 2학기 성적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방콕행 비행기를 탑승했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유명하다는 카오산로드에 도착했다. 여행자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거나 춤을 춘다거나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거리에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고, 쓰레기는 뒹굴거리고, 고기 굽는 냄새가 났었다. 신기한 마음에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란 책을 품고 카오산을 누볐다. 배낭여행은 난생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책을 빠르게 읽었다. 개중 눈에 들어온 단어는 ‘문신’이었다.
문신은 여행의 훈장이었다. 노트북으로 어떠한 문신을 할지 종일 문신 사진만 구경했다.
‘이건 촌스러워, 이건 보기 흉할 수도 있어, 이건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안 창피할까, 지우고 싶으면 어떻게 해.’
갖은 고민 끝에 내가 고른 도안은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나에게 큰 의미였다. 지금도 해저를 유유히 헤엄치는 심해 속 물고기를 동경하고 있다. 나폴레옹 피쉬를 처음 실물로 보았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저 물고기는 혹도 크고, 입도 크고, 덩치도 크네? 하릴없이 헤엄치는 모습이 그 당시에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나폴레옹 피쉬를 새기기엔 못생겼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새긴 물고기는 잉어랑 생김새가 비슷했다. 타투리스트는 내가 보여준 도안을 어깨에 따라 그렸다. 위치 선정은 친언니가 직접 해 주었다. 다시 모양새나 위치를 사진으로도 찍어서 확인시켜 주었다. 음, OK! 이대로 문신을 새겼다. 다 완성된 후에 사진 찍어서 보니 등에 있는 모공도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그라데이션이 예쁘게 들어가 물고기가 생생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내 물고기를 보면서 “메기냐? 메기냐? 메기냐?”라는 반복된 질문에 “아니야, 어떻게 이게 메기로 보여?”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나도 가끔 메기로 보일 때가 있다.)
이제 물고기를 몸에 새기기도, 눈으로 즐기기도, 입으로 느끼기도 하는 베스트 아이템이다. 어딜 가더라도 물고기에게 눈길 하나 더 주고, 물고기를 음미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물고기를 문신한 사람이니까! 환생이 있다면 물고기로 환생하고 싶다는 상상도 가끔 한다. 물고기로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맛있는 식사가 된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죽음이지 않을까.
태국 북부를 홀로 여행을 한 것은 2011년 초였다. 캄보디아와 베트남, 라오스를 갔다 온 뒤에 언니와 한 달가량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50L짜리 배낭을 메고 아유타야로 향했다.
사람들은 홀로 여행을 다니면 영어를 잘하는 줄만 안다. 전혀 못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주 기초적인 것만 할 줄 아는 수준이었다. 생존 영어. 나는 내가 하는 영어를 생존 영어라고 부른다.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원하는 바만 말하는 수준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넌 닥치고 내 말만 들어.’였다.
아유타야에서 혼자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여 짐을 풀 때 굉장히 어색했다. 혼자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왠지 쓸쓸한 기분도 들었고, 잘 버틸 수 있을까 염려도 있었고 밤은 깊기만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그날 저녁에 보았던 커다란 석양이었다. 오롯하게 뜬 노란 태양이 따스하게 내 몸을 데워 주었다. 그 온기를 기억하며, 커다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유타야를 둘러보고 치앙마이행 기차를 탔다. 그러자 40대로 추정되는 현지인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관심은 나쁘지 않군. 마치 연예인이 된 것 같아.’
숙소를 어디로 할지 대강 정보를 훑어보기 위해 가이드북을 피자, 현지인 중 한 명이 내 옆에 왔다. 그의 눈동자는 특이한 외모의 동양인인 나보다 가이드북에 적혀 있는 한글에 집중되었다. 선심 쓰듯 가이드북을 보기 쉽게 그를 향해 보여주었다. 표지에 왕궁 사진이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왕궁을 가리키며 “타이랜드!”라고 외쳤다. 순간 난 떨렸다. 작은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저씨의 말을 시작으로 말을 트면서 몸짓 발짓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내 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꿈틀거렸다.
‘혼자 여행하는 거, 껌이네.’
그렇게 용감하게 치앙마이, 매홍손, 빠이를 다녀오고 방콕에서 다시 친언니를 만났다.
세계여행은 순조롭게 마쳤다. 딱 1년간 다닌 자유여행은 나름의 추억이 되었다. 만약 그때 부모님이 “너도 가라, 세계여행.”이라며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경험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드 명세서를 뽑아서 내가 쓴 경비를 갚으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졸업하고 백수로 지내다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다큐멘터리 막내 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누가 좀 뜯어말렸어야 했다.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과 대화하는 게 즐거웠고, 일기 쓰는 게 재밌었다. 구성작가를 하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 직업이 재미있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출근했을 때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 급여에 4대 보험은 안 되었고 섭외 전화, 자료 조사, 프리뷰 등 해야 할 업무 때문에 야근은 무조건이었고, 맘 놓고 쉬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일을 해도 잘하지 못했다. 욕은 안 먹어야 하는데 하루가 무섭게 매일 메인 작가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손이 빠르지 못하다든가, 취재를 못 하면 자료 조사라도 잘하든가, 섭외라도 똑바르게 하든가 등 다양한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내가 노력한다는 사실을 메인 작가도 알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에 못마땅했다. 나도 더는 버틸 자신도 없었다. 뭐든지 빨리하고 정확해야 하는 업무가 버거워졌다.
막상 퇴사를 결정하고 나니 500만 원이 눈에 밟혔다. 전 재산이 꼴랑 500만 원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한국에 궁둥이 붙이고 있자니 부모님의 눈총이 싫었다. 한국 물가를 생각하면 500만 원은 금방 쓸 것만 같았다. 외국으로 눈을 돌리자 생각나는 나라는 태국이었다. 마침 친언니가 외국인노동자로 방콕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니 집에서 기생하며 모아두었던 500만 원을 야금야금 쓰면 꽤 버틸 자신이 있었다. 정떨어진 구성작가 일, 정떨어진 한국을 떠나 태국으로 피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