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는 심하지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갈 수 있는 봄이 되었다. 집 근처 천변 산책로를 걷기 안성맞춤이었다. 온도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녹은 물에서 헤엄치는 오리가 만들어내는 파동을 볼 수 있었다. 볕을 쬐고 앉아 있는 새들의 깃털이 왠지 보송보송해 보이기도 하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더 신나 보이기도 했다. 겨우내 땀 한 방울 제대로 흘려보내지 못했던 내 몸도 이제 후끈후끈해지는 날이 온 것이다. 집에서 TV만 보던 가족들이 함께 보고 듣고 느낄 것이 많은 바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산들산들한 발걸음들 사이에 유독 느리고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니 대부분 핸드폰을 보느라 그렇게 걷고 있었던 것이다. 포켓몬 잡으며 나란히 걷는 부녀,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듣지 않고 폰을 보고 있는 아들, 벤치에 앉아 말없이 폰을 보고 있는 커플, 길 한 복판에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한 청년… 셈 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폰을 보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있었다.
스몸비라는 신조어가 있다.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로 스마트폰에 빠져 주변 상황 파악도 안 하고 느릿느릿 걷는 사람들이 마치 좀비 같다 하여 만들어졌다. 바쁜 아침 유독 느리게 걷는 사람을 가로질러 가보면 거의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열차에서 내려 지하철 출구로 향하는 길은 오른쪽인데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향하다 결국 막다른 벽에 부딪히자 그제야 반대로 돌아오는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각한 교통사고도 증가하고 있는 걸로 보아선 계단에서 넘어지는 것은 애교일 정도다.
나는 대중교통 이용 시 자리에 앉아있거나, 길을 걸을 때 완전히 서있는 때를 제외하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워낙 잘 넘어지고 부딪히는 부주의한 성격 탓에 스마트폰까지 집중하여 보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핸드폰조차 없던 중학생 시절, 친구가 준 편지를 읽으며 걷다 전봇대에 부딪혀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만화영화 속 한 장면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런 위험을 몸소 익힌 탓인지 이렇게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 아찔한 높이의 에스컬레이터도 성큼성큼 내려가고 바뀐 신호를 보지 못하고 횡단보도 코앞까지 급한 속도로 다가오는 차도 보지 않는다. 무엇을 보기에 다칠 것을 각오하고 이렇게 걸어가는 시간까지 쪼개어 보는 것일까.
감각이 주는 즐거움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게 이런 현상의 원인이 아닐까. 원했든 원치 않았든 살아가느라 놓치게 된 크고 작은 감각적 즐거움을 미디어가 대신 메워 주고 있는 것이다. 봄볕이 주는 따뜻함, 사람들과의 대화, 아직 찬바람에 떨고 있는 고양이,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의 구성진 노랫가락... 감각에 귀 기울이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스마트폰에게 내어주고 우리는 날 것의 감각에 취약한 스마트한 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스마트 폰을 보지 않았을 뿐, 사실 나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외에는 그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게 차단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마도 도시에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들어야 하고 너무 많은 사람과 사물에 압도되어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귀를 닫은 채 손바닥 세상에 몰두하고 있는 좀비는 아닌지 다시 돌아본다. 살기 힘들고 그다지 유쾌한 사람도 자연도 마주칠 일 없는 세상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눈을 켜고 귀를 열면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_ 박진희
그림_ 김현주
당신과 내가 함께 사는 세상 속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