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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26. 2017

나는 왜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가


어릴 적 살던 집에는 작은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내방에서 올라갈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나만의 아늑한 아지트가 되었다. 만화책을 한가득 들고 올라가 다 볼 때까지 내려오지 않아도, 들키지 않고 엉엉 울고 싶을 때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아늑함도 오래 가진 못했다. 나만의 다락방에 엄마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쌓여만 갔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서 경품으로 받은 대형 플라스틱 대야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더니 몇 년간 한 번도 쓴 적 없는 새 대야가 10개가 넘어갔다. 그뿐 아니다. 똑같은 주전자와 냄비, 비슷한 용도의 고기 불판, 한 번도 덮은 적 없는 이불, 선풍기 등이 차곡차곡 늘어만 갔다. 결국 나만의 아지트는 몇 년동안 쓰지 않는 물건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나는 발 디딜 틈 없이 좁아진 다락방에 더는 올라갈 수가 없게 되었다.

나 역시 물건들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진 않았다. 물건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나의 거센 항의는 빗발쳤다.

“안 쓰는 물건이잖아! 엄마 제발 좀 버리자! 안 쓰는 것 모셔두고 사는 건 쓰레기를 안고 살아가는 거랑 다름없다고!!”

“얘는, 나중에 다 쓸 날이 있어!”


두면 다 쓴다는 논리로 엄마는 살림살이에 대한 권리를 내세웠고 결국 나의 거센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품 받은 살림살이들을 마음껏 다락에 모셔두었다. 그땐 엄마의 이런 물건 수집이 이상하다 여겼다. 김치 담글 때 필요한 대형 대야도 하나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사이즈별로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안 쓰는 고기 불판은 왜 다락에서 잠들어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만 있으면 될 것을 왜 굳이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왜 나만의 아지트를 빼앗어 가면서까지 쓰지 않는 물건을 쌓아 두는 것일까. 나는 못마땅하기만 했다. 두면 다 쓸 데가 있다는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하여 살림을 꾸리고 있는 나 역시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물건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없는 형편에 결혼을 하여 살림살이를 거의 사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결혼 전에 각각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 쓰던 것을 가지고 살림을 합쳤다. 2만 원 주고 산 중고 세탁기, 각각 자기 집에서 가져온 그릇과 냄비, 짝이 맞지 않는 수저세트, 통일되지 않은 색상의 가구들이 결혼이란 이러한 불협화음을 맞춰가는 과정임을 알려주듯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을 서로 합치니 두세개씩 넘쳐났다. 그러나 막상 쓰는 건 그 중  하나 뿐이었다. 나머지는 손을 데지도 못하는데 나는 그 물건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다기 보단 못 버렸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나 역시 엄마처럼 언젠가는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쓰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살았다. 모두 다 아까웠다.




미니멀리스트, 미니멀 라이프가 요즘 떠오르는 라이프스타일이다.

간결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면서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미니멀 라이프가 추구하는 방향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물건에 맞추며 살기보단 물건을 자신에게 맞추거나 물건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쓴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나를 나타내는 시대에서 벗어나려는 건 좋은 움직임이다. 좋은 집이나 차를 가져야, 잘 나가는 신상을 가장 먼저 가진 얼리어답터가 되어야 잘난 사람으로 평가받는 가치관에 나 역시 반기를 들고 싶다.


텅 빈 방, 몇 가지의 옷과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만 구비하고 살아가는 몇몇 미니멀리스트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얼마나 많은 물건을 갖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반성한 적이 많다.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버리고 또 버리며 나도 그런 미니멀 라이프에 동참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저 잡동사니를 버릴 수가 없었다.

내게 집은 잠만 자고 나가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집은 내게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숙소이기도 하고, 식당이기도 하면서, 작업실이기도 하고,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각각의 역할에 맞는 물건들이 최소한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려면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했고, 그러려면 적어도 프라이팬, 궁중팬, 냄비, 곰솥 냄비 같은 구색을 갖춰야만 했다.


작은 집이기에 어차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이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줄이는 삶 대신 유지하는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옷을 몇 벌 사면 최근 3년간 손을 데지 않은 옷을 찾아내 버려서 새 옷을 넣을 공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새 물건을 사면 무조건 헌 것을 버려야겠단 생각을 하자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다. 새 그릇을 사고 싶어도 쓰던 그릇이 너무나 멀쩡하니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공간을 유지했다. 중간중간 물건들을 정리해도 집안에 빈 공간은 늘어나지 않았다. 책에 나온 미니멀리스트의 집을 만들려면 우선 가구부터 버려야 했지만 가구도 없는 집에서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막한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참 편하고 좋았다.





마침내 버리지 않고 묵혀두었던 물건이 빛을 발하는 때가 찾아왔다.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일을 하러 가자 몇 해째 쓰지 않던 짝이 다른 수저세트와 남아 있던 빨래 건조대, 방치되어있던 책상과 의자 등이 다시금 창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얗게 곰팡이가 슬어 결국에 버려질 물건들이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다. 버릴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그냥 두길 잘 했단 생각이 들어 어깨가 으쓱해진다. 버렸으면 다시 돈을 들여 사야 하는 물건들이다. 쓰지 않는 가치없이 방치된 물건들이 사용하면 제 값어치를 충분히 발휘한다.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이익이다. 그게 얼마 하냐고 궁색하게 물건들을 쌓아두고 사느냐는 반론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이득인 것이다.


집에 작은 상자가 늘어간다. 거기엔 사진이나 편지, 쪽지, 티켓 같은 추억의 물건들이 들어있다. 글을 쓸 당시 상대방의 감정이나 그것을 받았을 때 내 감정이 담긴 추억을 버릴 수 없어 차곡차곡 모아둔다. 상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나는 또 다른 짐을 줄여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똑같이 물을 것이다.

“왜 쓰레기를 모아 두고 그래.”

그러면 나는 엄마와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두면 다 쓸 데가 있어.”


누군가는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진 텅 빈 집이 가장 좋은 공간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낄 수 있는 것을 아끼기 위해 비우는 것이 더 잘 맞다. 있는 것을 잘 쓰는 삶, 이것을 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만 사는 삶, 내가 가진 물건이 모두 쓸모 있게 쓰이는 삶을 살고 싶다.

집안 물건 어느 하나 내게 의미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 공간이 더없이 편안하다.

아무래도 최소한만 가지고 사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긴 글렀다.







서로 다른 우리가 공존하는 이 시간,
그 시간 속의 일상과 단면을
이야기하다.
그리다.
나누다.
 writing_ jinhee  X  drawing_ p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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