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웃기도 하지만 잘 울기도 하는 편이다.
울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위로는 “울지 마, 넌 웃는 게 예뻐”였다. 격한 감정에 사로 잡혀 우느라 대꾸를 못했지만 나는 늘 반박하고 싶었다.
“아니, 웃는 게 안 예쁜 사람이 어디 있어!”
안쓰러워 위로 차 건넨 말이겠지만, 이 말을 들을 때면 더 서글퍼졌던 것 같다.
‘아니, 슬플 때조차 예뻐야 한단 말인가? 왜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라는 말은 해주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울고 싶을 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실컷 울어” 아니었을까.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는 문화가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에 새겨진 것 같다.
나조차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울어야 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 많이 울면 큰일 나는 줄 알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누군가 엉엉 울 때 드러나는 슬픔이란 감정에 사람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자 울음의 반대말로 웃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웃는 게 가장 예쁘다는 말이 흔히 쓰이는 위로의 말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누군가 ‘넌 우는 것도 예뻐’라고 말했으면 눈물을 뚝그치고 그 사람에게 홀딱 반했을 것 같다. 이런 감정의 나도, 저런 감정의 나도 모두 예쁘게 받아들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나를 이해하는 내 편이 아닐까.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적나라한 감정에 노출되는 것을 힘겨워했고 어서 웃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사람은 어릴 적엔 감정 표현에 매우 적극적이다. 아파서 울고, 좋아서 웃고, 배고파서 울고, 맛있어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다 맛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는 것을 하나씩 배워가게 된다. 가끔 나도 모르게 사회 원칙에 어긋나는 감정 표현을 하면 어디선가 날아오는 등짝 스매싱에 스스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 둘 통제를 배우며 어른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비속이나 샤워 부스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게 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도록 더 철저하게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워갔다.
어린 시절에 비는 슬픔을 덮는 장치가 아니었다.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다 흙탕물을 뒤집어쓸수록 얼굴엔 웃음이 피어났다. 어릴 때 비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 비가 온다며 좋다고 비를 맞으며 다녀선 안되었고 게다가 웃기까지 하면 더욱더 큰일났다. 신나고 기분 좋은 마음을 표현했다간 실성한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모두 다 우산 속에 얼굴을 묻고 무표정하게 걸어갔다. 저들 중 빗물에 눈물을 숨기는 사람도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걷는데 친구에게서 재미있는 메시지가 왔다. 즐거운 마음에 이가 보이도록 활짝 웃었더니 마주 보며 걸어오는 사람이 흠칫 놀라 방향을 약간 틀었다. 나의 즐거움이 지나가는 이에게도 전달되면 좋을 텐데… 비 오는 날 약간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아쉽다.
울던 웃던 나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세상. 어른이 되어도 엉엉 울어도 좋고 빗속을 마구 뛰어도 좋은 세상. 그렇게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한번 꿈꿔보며 또 방긋 웃는다. 마주 보며 걷는 사람도 몇 미터 후쯤 지나 나를 생각하여 어이없는 웃음이라도 지었으면 좋겠다. 하얀 이를 보이며 아주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우리가 공존하는 이 시간,
그 시간 속의 일상과 단면을
이야기하다.
그리다.
나누다.
글_ jinhee X 그림_ pat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