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드마 아사나 (연꽃 자세)
요가를 모르던 때, 특히나 호흡법을 모르던 때에는 명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 때 편하게 숨을 쉬며 집중하는 게 명상이라던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고, 눈을 감고 앉아있으면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그것에 대응하는 묘책을 세우느라 바빴다. 차분한 음악과 분위기도 소용없었다. 내 안의 생각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오히려 꼬리의 꼬리를 물며 크게 퍼져나갔다. 그러다 전에 잠시 다닌 요가원에서 10분간의 명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비우고 몰입하는 명상은 오래 수련한 사람들이나 편히 할 수 있는 것이고, 나처럼 처음 명상을 접한 사람은 생각을 비우기 위해 다른 곳에 몰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여러 요가 동작으로 몸의 에너지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가만히 앉아 두 손바닥을 마주 보게 한다. 딱 붙이는 것이 아니라 1~2cm 떼고 손과 손 사이의 에너지에 집중하면서 동그란 물체를 빗듯 손을 돌린다. 그러저 손바닥 가운데 마치 따뜻한 공기 구슬이 들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며 그 에너지가 내 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의 온갖 잡념이 사라지고 손에 만져질 듯한 그 에너지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었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자 선생님께서 다리가 많이 저렸을 텐데 집중을 잘 한 모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파드마 아사나(결가부좌)가 되지 않아 반가부좌만 한 채로 앉아있기도 힘든 때였다.
그 후로 집에서 요가 수련을 할 때에는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명상부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배워온 대로 손바닥의 에너지들을 느끼며 생각을 비워내는데 힘썼고, 어느 순간이 되자 손의 에너지보다 그저 앉아서 호흡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조금씩 반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집중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요가원에서 파드마 아사나를 만났을 때에도 좌골과 무릎이 팽팽하게 늘어나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몸을 무리해서 쓰면 안 되지만 나도 언젠가는 파드마를 하는 날이 올까 기대와 의심을 품기도 했었다. 이 자세는 내게 적어도 10년은 수련해야 할 수 있는 자세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단념을 하면서도 나의 한계에 맞게 반가부좌 명상을 이어갔고 어느 날 요가원에서 파드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역시나겠지 하며 조심스레 한쪽 발을 다른 쪽 골반 위에 올리고 반대쪽 발을 들어 무릎 위로 가져오는데, 이게 웬일인가. 반대편 발목이 사뿐히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물론 완성된 파드마에 다가가려면 더없이 부족하지만 평생을 수련해야 가능할 것 같은 파드마가 내 몸안에서 형태를 갖춘 것이다. 이때 사실 너무 기뻐 “으하핫”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너무 기쁜 마음도 내려놓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요가 아니겠는가. 나는 마음속 안에서 올라오는 기쁨의 소리를 내면의 귀로만 들으며 평온함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양쪽 다리가 다 꼬아졌다고 파드마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름에서와 같이 흙탕물 깊은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곧게 뻗은 연꽃처럼 꼬리뼈에서부터 깊은 뿌리를 내리고 척추를 따라 나의 뿌리를 곧게 펴고 마침내 아름다운 연꽃을 피어내는 과정이 파드마가 만들어지는 길일 것이다. 아직도 들뜨는 무릎과 불안정한 뿌리 그리고 중심을 잡으려 자꾸만 굽어지는 척추를 곧게 펴고 내면을 들여다본다. 곧게 펼쳐진 나의 몸 위로 연꽃이 얼마나 피어올랐는지, 잡념이 가득한 흙탕물의 세계에 동요되지 않고 얼마나 단단히 뿌리내렸는지 살핀다. 그러다 보면 파드마 아사나의 고통은 조금씩 사라지고 조금씩 펴지는 척추를 따라 편안하게 피어오르는 내면의 꽃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명상의 시간이 초보인 내게는 극히 드문 경험이다. 늘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꽃 피우려는 노력이 나를 이미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지 않는 것보단 서툴러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그저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자 바로 요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