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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Dec 04. 2020

좋은 문장을 오래 간직하는 법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잠시 기다리는 상황, 원래 계획으로는 며칠 여유가 생긴 동안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해보거나 조금 멀어 가기 힘들었던 곳을 다녀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19 확산세는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고 어제는 600명이 넘는 확진자가 쏟아져 나왔다. 나를 위해, 모두를 위해, 이런 때는 그냥 잠시 집에서 쉬어주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 들었다. 가보고 싶었던 곳이야 어디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건강은 잃게 되면 당장 큰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수술을 앞두고 있으니 자꾸만 몸을 사리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을 금요일 오후, 나른하게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며 거실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오후의 시간을 보낸 적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주어진 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괜히 티비 리모컨만 만지작거렸다. 뉴스에서는 온통 흉흉한 소식뿐, 더 듣고 싶은 내용이 없어 티비를 끄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와 펜, 앞에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딱히 할 것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엔 필사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손에 힘을 많이 주고 글씨를 쓰는 편이기 때문에 필사를 많이 하고 나면 팔목이 얼얼할 때가 있다. 그래도 쓰고 나면 아주 영양가 좋은 음식을 꼭꼭 씹어 잘 소화시킨 기분이 든다. 눈으로 보며 읽고, 손으로 쓰며 읽고, 다 쓰고 다시 한번 나의 글씨로 된 글을 읽고, 적어도 세 번 글을 읽게 된다. 더디게 읽는 방법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내 속에서 녹아있게 되는 독서법이다. 그래서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씩 자투리 시간이 나면 필사를 하곤 했다.


처음 그저 끄적거리는 것을 넘어서 책을 보고 필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요양을 위해 산골마을로 이사했을 때였다. 동네에 또래 친구들은 하나 없고 여든을 훌쩍 넘기신 어르신들뿐이었다. 남편이 직장에 출근하고 나면 적어도 9시간 정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늘 바쁘게 살기만 할 줄 알았지 온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써본 적이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때 당시 붓으로 쓰는 캘리그래피가 대유행이어서 먹을 갈고 화선지를 깔고 몇 마디 캘리그래피를 따라 써보았다. 연습한 화선지가 수십 장 넘도록 쌓여갔지만 시간은 고작 몇십 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즐겁게 글씨 쓰는 시간이 아니라 지루한 나와의 싸움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뒤처리 할 것도 많아 귀찮아지기까지 했다. 금세 흥미를 잃고 앉아 책을 펼쳤지만 독서도 한두 시간 지나면 몸부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나도 이렇게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의 글을 곱씹어 읽기 위해 따라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필사했다. 그게 첫 필사 경험이었다. 이상하게 캘리그래피를 할 때나 그냥 독서를 할 때보다 필사를 하면 더 집중이 잘 되었고 시간도 금방 갔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필사할 때 펜 서걱거리는 소리가 몰입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뒤처리 할 것도 없이 노트와 책을 덮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간단한가. 읽다가 쓰다가, 팔이 아프면 다시 읽다가, 또 쓰면 됐다. 이렇게 적적함을 달래려 시작했던 필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날이 오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산골마을에서 살고 있을 때 인연이 닿은 조경국 작가님은 <필사의 기초>라는 책을 쓰셨다. 그야말로 필사의 모든 것에 관한 책이다. 필사는 무엇이며, 어떤 책을 어떻게 쓰면 좋은지, 그리고 어떤 도구들을 사용하면 좋은지까지 담고 있다.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필사에 좋은 시간과 장소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요. 아무래도 필사를 하려면 사위가 고요할수록 좋습니다. 낮보다는 밤이, 봄이나 여름보다 가을이나 겨울이 더 좋겠군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공간이나 서재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중략) 필사는 외로움을 견디고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습니다. (중략) 필사하기에 완벽한 시간과 공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투리 시간에 책과 노트를 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방해받지 않는 작은 노트를 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잠깐의 여유, 그것만 있다면 짧아도 좋으니 한 문장이라도 적어보는 것이 어떨까. 펜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집중하여 쓸데없이 많이 받아들이게 되는 정보들을 잠시 차단하고 오직 나의 손과 눈에만 기대는 시간. 그 시간이 다른 열 마디 말보다 외로움을 녹여주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우리 책방에는 일명 작가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다. 마치 작가의 집필실 같이 서가로 둘러싸인 방, 그곳에는 필사 노트가 준비되어 있다. 많은 분들이 그곳에 앉아 필사를 한다. 한참을 앉아 많은 분량을 쓰고 가는 분도 있고, 한 줄을 적고 가는 분도 있다. 얼마만큼을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글씨가 삐뚤어도 좋다. 그저 책방을 찾아오는 긴 여정 중에 잠시라도 멈춰 나의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된 것이다. 아무 의미 없이 써도 좋다. 언젠가 긴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이때의 경험이 씨앗이 되어 필사의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쓴 그 한 문장이 인생의 문장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내가 우연히 마주한 책의 문장처럼 말이다.


섬의 자연은 인생에 시달린 자의 가슴을 다스려준다. 때로는 세차게 후려치기도 하고 부드럽게 달래 주기도 하면서. 그 음악에 마음을 공명 시켜 본다. -<풍경의 깊이>,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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