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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목요 산책 02화

봄 01. 쿵쾅쿵쾅

by 지호

“그래, 알았다.”“응, 끊어.“ 별 것 없는 통화였다. 별 내용 없는 통화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엄마와의 통화가 끝난 뒤였다. 통화 뒤의, 마치 운동화 속 모래 알갱이들처럼 남아있는 그런 불편한 여운감을 잊기 위해 의식해서 생각을 차단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잊으려 할수록 불편감은 더욱더 또렷해진다. 이러다 하루를 이런 감각으로 보내버리겠어. 나가자.


새 운동화를 신었다.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 그리고 걸으면서 생각을 하건 떨쳐버리건 뭐라도 해야 한다.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더라도 잔잔히 끓어오르는 화는 내 선에서 수습하고 싶다. 그대로 뒀다간 다른 일이나 관계들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씨는 흐리다. 봄이라더니 오늘 볕은 온 데 간데없다. 미세먼지도 좋지 않아 살짝 뿌옇기까지 하다. 적당히 두께감이 있지만 간단한 느낌을 주는 긴소매 티셔츠에 남편의 가죽재킷을 여유 있게 걸쳤다. 움직임이 편하고 입었을 때의 안락함으로 남편보다 내가 더 자주 입는 옷이다. 살짝 가죽 냄새가 나지만 싫지 않다. 통이 넓은 탁한 하늘색 추리닝 바지에 새 운동화를 신었다.


첫 산책에 관한 글을 이런 식으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없는 삶을 지어낼 수는 없으니까. 딱히 척하는 것도 소질이 없다. 문 밖으로 나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발이 아프다. 역시 새 운동화라 어쩔 수 없는가 싶다가도 처음 겪는 발 볼의 통증에 이번 신발은 잘못 골랐구나 싶다. 자주 걸어서 길을 들여봐야겠다. 쿵쾅쿵쾅. 나도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간다. 발 볼의 통증이 아릿하게 있지만 일어나는 잔잔한 화는 그마저도 둔하게 만든다. 땅에게 분풀이하듯, 아니 마치 이런 나의 화를 받아달라는 듯 양 발에 감정을 실어 걸었다. 쿵. 쿵. 쾅. 쾅.


공원으로 가는 길, 작은 오르막이 있다. 괜한 심술에 오르막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속도와 지금의 파워를 유지한 채 올라가 주겠노라고 마치 땅과 경쟁하듯 걸었다. 지지 않아. 쿵쾅쿵쾅. 내 기준, 일정한 속도와 파워로 오르막을 넘은 것 같다. 뿌듯하다. 심장이 뛴다. 살짝 덥다. 날이 흐린 데다 모처럼의 찬바람까지 불어 쌀쌀한 편인데도 가죽재킷 안은 내 몸에서 나는 열기로 후끈했다. 땀이 난다. 그러다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다.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뭘 지지 않겠다고 그렇게까지… 방금 전까지의 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금 화가 난다. 그래도 땅이 내 분을 받아준 덕분에 처음의 화보다는 강도가 낮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려다 이내 관둔다. 화가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쉽지 않다. 상대를 원망하는 결론을 내어버리기 쉬우니까. 그렇다면 남은 불씨는 어떻게 제거하지? 횡단보도를 건너고 익숙한 건물 근처로 갔다. 코노다! 코인노래방이 보인다. 늘 남편과 둘이 갔던 곳인데 처음으로 혼자 가본다. 충전금액이 얼마 정도 남아 있을 텐데… 그거 다 쓰고 와야겠다.


모자란다. 이 금액으론 몇 곡 부를 수 없다. 만원 정도를 더 충전하고는 아무도 없는 코인 노래방에 혼자 입성했다. 괜히 신이 난다. 아무도 없어 살짝 무섭긴 했지만, 이곳은 최신식으로 꾸며져 밝은 느낌을 준다. 방마다 cctv도 설치되어 있고 직원이 있는 작은 룸도 있다. 직원이 있을 땐 늘 그 룸의 문이 열려있지만 지금은 닫혀있는 것으로 보아 자리를 비운 것도 같다. 이 공간에 나 혼자라니. 살짝의 긴장감을 안고 큰 창이 외부로 나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아까 걸어왔던 길이 보이는 자리다. 좋아. 시작해 볼까?


10곡 정도를 불렀고 마지막은 100점이 나와 보너스로 1곡을 더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총 11곡의 곡을 생수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불렀더니 목이 쇠하다. 이 정도면 됐어. 자리를 정리하고 룸 밖을 나오니 어느새 듬성듬성 룸들이 차있다. 어설픈 낮시간의 노래방은 궤도에서 벗어난 소소한 일탈 같구나 하는 작은 희열을 느끼며, 그리고 소멸될 듯 꺼질듯한 아까의 불씨를 확인하고는 차분한 걸음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내가 화가 났던 이유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근원이 되는 단어들을 생각하고 하나의 문장으로 다듬기 위해 애를 썼다. 알고 있는 단어들과, 들어보았던 문장들과 적절한 문체를 찾아 내 머릿속의 서랍에 기록하기 위해. 그리고 되도록이면 까먹지 않도록, 살면서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가방 속 캔디처럼 쉽게 꺼내어 먹을 수 있도록 단순한 문장으로. 살짝의 미간을 찌푸리며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졌다. 눈은 걸음마다 지나는 길 가의 나무나 돌을 보지만 그야말로 보고만 있을 뿐이다. 시선만 향해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지금 내 진짜 눈은 머릿속으로 향해 있다. 얼굴에 달려있는 내 눈의 중심은 흩어져있다.


현실로 초점이 돌아올 때는 귀여운 것들을 발견할 때다. 산책하는 강아지나 풀 숲을 조용히 지나다니는 고양이들을 봤을 때. 요즘엔 산책하는 강아지들이 많다. 개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만 개가 나를 무서워할까 봐 일부러 멀리서 지나가는 편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작은 녀석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시선은 흘깃 녀석들을 보곤 한다. 귀여운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 이왕이면 털이 복슬복슬한 적당한 두께감의 하얀 강아지였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마침 비슷한 모습을 한 녀석이 옆을 지나간다. 예쁜 빨강의 목줄까지 했다. 더없이 귀엽다. 아까 하고 있던 생각들은 녀석의 하얀 털처럼 보슬보슬해지더니 온 데 간데없다. 나는 이토록 시각적인 것에 약하다.


남모를 미소를 띠며, 귀여운 걸 보았다는 뿌듯함까지 느끼며 동공에 총기를 채웠다. 커피나 사갈까 하는데 대각선 앞 10m 거리에 산책 중인 비교적 큰 강아지가 보인다. 그리고 주인이 보인다. 헌데 왜인지 거리를 두고 싶다. 다가가고 싶지 않다. 그 강아지의 주인이 입은 옷과 내가 입은 옷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머리 모양도 비슷하다(나는 층이 진 단발머리다). 커다랗고 부품한 가죽재킷에 잿빛 도는 하늘색 통 넓은 추리닝 바지와 머리모양까지. 다른 게 있다면 신고 있는 신발의 색상정도다.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내가 먼저 인식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 옆을 뚝딱거리며 걷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의식하면 행동거지가 매우 어설퍼진다. 그리고 오늘의 도플갱어 발견! 과 같은 느낌이라 그분과 나 사이에 결계를 쳐야 할 것 같다. 동족(?)에 대한 거리낌도 든다.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곁을 지나면 평행 우주가 꼬여 이 세계에 혼란이 온다던지 하는 에피소드 같은 걸 상상했다. 갑자기 달이 두 개가 된다던지 어디선가 쓰나미가 일어난다던지 하는. 핸드폰을 보며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살짝살짝 고갤 들어 앞을 보았다. 강아지가 호기심이 많은지 자주 멈춰서는 게 보인다. 아. 역시 어쩔 수 없군.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어가야겠다. 하고는 다시 핸드폰 화면을 살폈다. 의미 없는 인스타 업뎃만 만지작 거리며 느리게 느리게 걸음을 옮기다 다시금 고갤 들어 보니 어느새 그 둘은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 난 혼자 뭘 한 거지. 멍청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상상에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난 혼자 놀기의 초고수다. 그리고 괜히 미안했다. 나의 주춤거림이 강아지에 대한 공포심으로 보여 자리를 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에이, 별 생각을. 하고는 터덜터덜 걸었다. 따뜻한 라떼를 한 잔 테이크아웃 하고는 아이를 데리러 갔다. 이렇게 또 혼자 하루의 비밀스런 재미가 생겼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나만의 두 시간짜리 에피소드다. 덕분에 화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그저 현상만 남았다. 떨어진 꽃잎들이 어느샌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맛에 산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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