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노그림 Nov 26. 2021

무라노와 부라노 - 저만 헷갈려 하나요?

무라노와 부라노, 이탈리아

  꼬마 마르코는 오늘도 할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마술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모래와 불과 공기로 할아버지는 영롱한 빛깔의 유리잔을 만들더니 어느새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발을 구르고 있는 말을 만들기도 하신다.


  마르코의 할아버지는 유리공예 기술자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일을 배워 지금은 어엿한 기술자가 되었다. 아마도 마르코 역시 유리공예 기술자가 될 것이다. 몇 년 전 유리공예 작업장에서 화재가 일어나서 섬 전체가 화마에 휩쓸린 뻔한 일이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섬 주민 전체와 공공의 안위를 위하여 유리공예 작업장을 모두 무라노 섬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살고 있던 거리를 떠나 섬으로 이주하는 것이 꼬마 마르코는 싫었지만 어른들의 결정에 어쩔 수 없었다. 공화국의 무역상품 중에 유리공예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런 인기상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유리공예 기술자가 되면 바다로 직접 나아가서 무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물질적, 경제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다. 대신에 베네치아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유리공예 기술의 독점을 위하여 공화국 정부는 매우 단호한 방식으로 기술유출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유리공예를 시작하게 하면 평생 베네치아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유리공예 기술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대를 이어 유리공예기술을 전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무라노 섬에서는 예전의 방식으로 유리공예제품을 만들고 있다.


  무라노섬은 본섬에서 멀지 않아서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라도 잠깐은 들러볼 수 있다. 느긋한 기분으로 유리공예 전시장도 둘러보고(멋지고 화려하지만 너무 비싸서 살 엄두는 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직접 작업장도 볼 수 있다. 다만 진귀한 구경거리를 봤으니 예의상이라도 작은 소품 한두 개는 사주어야 할 것 같다.


  이곳에서 모두 만든 진품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몇 유로 정도로 이곳에서의 추억을 간직할 기념품을 장만했다 생각하면 되겠다. 본섬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몇 개의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빤히 눈에 보이지만 저 멀리 다리를 돌아서 가야 할 경우도 있으니 느긋한 여행자가 아닌 경우에는 돌아갈 동선을 잘 확인해보고 다녀야 한다.         



  마치 형제와 같이 비슷한 이름의 또 다른 섬이 있다. 이곳에는 어부들이 살고 있다. 수로를 따라 세워진 집들은 고만고만한 크기에 생김새도 비슷하지만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분홍의 화사한 빛깔로 서로를 구분하고 있다.


  만선의 기쁨에 거나하게 한 잔 걸친 어부들이 실수하지 않고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짙은 안개에 자기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색깔을 각각 다르게 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이 풍경을 지키기 위하여 정해진 색깔 이외에는 마음대로 색을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


  부라노섬은 이렇게 알록달록 동화 속 세상 같은 풍경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부라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레이스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섬의 부인네들이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 만든 레이스를 구하기 위하여 유럽의 귀부인들이 부라노를 동경했지만 지금은 아마도 기계로 대량생산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공을 들인 레이스라고 하기엔 가격이 저렴하고 기계로 만든 거라 생각하면 조금 비싸다.              


 두 섬을 놓고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어디를 가는 것이 좋을까? 정답은 없다. 각자 좋아하는 취향이 다르니 정해줄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연인과 함께 왔다면 부라노가 나을 것 같다. 화려한 레이스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다리 위에서 또는 수로 옆에서 인생 샷을 건질 수도 있다. 이곳의 섬들도 다리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조그만 섬이니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피사의 사탑처럼 기우뚱하게 서있는 산 마르티노 교회도 찾아보고 광장 또는 수로 근처의 카페에서 간단한 요기 거리와 함께 스파클링 와인도 한잔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곳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분위기 있는 저녁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지 모른다.


  그래도 그건 참아야 한다. 마땅한 호텔도 없거니와 식당들도 본섬에 비하면 초저녁이면 문을 닫는다. 갑자기 심심해져서 본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이미 늦었다. 6시 정도면 본섬으로 가는 마지막 배가 떠난 뒤라서 꼼짝없이 섬에 갇힐 수 있다.      




  섬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있는 자월도라는 섬이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갔다가 그만 시간을 착각하고 마지막 배를 놓쳤다. 같이 모여서 영어공부를 하는 여자아이 하나, 남자아이 셋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모임이었다.


  왜 이 녀석들과 섬을 가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냥 갑자기 우리 섬에 한번 가볼까 했다가 가게 되었던 것 같다.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아이들이야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았지만 여자아이는 걱정을 많이 했다.


  우리보다 나이가 네 살 정도 어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간신히 공중전화를 찾아 부모님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냥 그렇게 밤을 새우게 되었다. 초여름의 길목이라 그랬는지 그냥 모래사장에 나뭇가지 몇 개 가져다 모닥불을 피우니 그럭저럭 밤을 보낼 만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새웠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갑갑해서 벗어놓은 안경이 모래 속으로 사라져서 넷이서 보물찾기 하듯이 모래 속을 파헤쳤던 기억만 남아 있다. 간신히 찾긴 했지만 모래에 쓸린 안경의 유리알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밤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그 모임은 더 이상 지속되지가 않았다. 같이 지내다 보니 A는 B를 좋아하게 되었고 B는 C를 좋아하고 C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서 애매했던 그런 관계가 그날 밤 정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졸업을 한 후에도 여자아이는 그 후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장난 삼아 그날 밤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몹시 당황하면서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C가 그날 밤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베네치아 본섬말고 주변의 작은 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무라노를 추천한다. 작지만 저렴한 호텔도 몇 군데 있고 늦은 저녁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식당도 있다. 혼자 여행하는 친구라면 무라노가 훨씬 나을 것이다. 남자끼리 여행을 왔다고 해도 무라노가 나을 것이다. 부라노에 비하면 비교적 섬의 개수도 많고 넓어서 쾌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가끔 여행을 같이 다니는 K형과 베네치아에 왔던 적이 있다. K형도 나도 너무 사람이 많은 곳이 피하고 싶었다. 본섬에서는 사진만 찍고 무라노로 와서 산책도 하고 유리공예 전시장도 둘러보고 맥주도 한잔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K형과는 섬에 같이 갇히고 싶은 생각이 일(1)도 없으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선착장으로 갔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고 두 섬을 모두 가보고 싶다면 산마르코 광장의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투어를 추천한다. 비록 한국어로 진행이 되지 않아서 불편하지만 마치 관광버스로 신속하게 목적지로 바로 이동하는 것처럼 관광보트로 무라노와 부라노를 둘러볼 수 있다. 북적거리는 바포레토를 타지 않고 편안하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는 성수기 베네치아를 방문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무라노 섬에서는 유리공예 작업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니 영어에 울렁증이 없는 관광객이라면 도전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다면 동행자를 구할 수도 있을지 모를 일 아닌가.        


  그나저나 C와 B는 그 후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각자의 삶을 다른 곳에서 살고 있을 테지. 나는 누구냐고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생각 없는 D라고 해두자. 늦가을 으슬으슬한 바람이 불던 날 카푸치노 한잔의 향기에 취했나 보다. 아니 옛날 생각에 취한 건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탈리아 친구들 휴가에 진심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