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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Nov 23. 2021

미세먼지 속에서도 아우라를 뽐내는 바위들

미세먼지 속 북한산

지난번 북한산이 아내에게 힘에 부쳤나 보다. 이번 주말에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 실컷 산속을 헤매다가 오라고 한다. 미세먼지도 많은 날이라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내가 흔쾌히 혼자 다녀오라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기에 보통 때보다 서둘러 집을 나선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이 족두리봉이다.

미세먼지는 시야가 뿌옇다. 이런 날 산속을 걷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닌다.

향로봉은 오늘도 그냥 통과하고 있다. 언제고 모든 봉우리들을 둘러보고 나면 오르고 싶어질 랑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곳은 그냥 늘 지나가기만 하고 있다.

이제 비봉에 오른다. 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은 약간 몽환적인 풍경이다.

이게 다 미세먼지라니 갑자기 폐가 아파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미세먼지로 시계 제로이다.

멀리 사모바위가 보인다. 미세먼지만 없다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미세먼지 때문인지 오늘은 비봉 정상이 한산하다.

비봉에서 커피 한 모금. 기운을 내서 내려가자.

다음은 사모바위이다.


이곳의 바위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정상에 저렇게 오묘한 자세로 쌓아두었는지 신기하다. 자연이 무작위로 벌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어느 정도의 확률이면 저 커다란 바위가 저 자세와 저 형태로 영겁의 시간을 지내올 수 있었을까. 자신의 발아래에 사람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고 굵직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 벌써 몇 천년일 텐데.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를 보고 고대 사람들이 어떤 경외감을 느꼈을지 상상을 해본다.


11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배가 고프다.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 후 다시 길을 잡는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10분 휴식. 이제 승가봉으로 간다.

이곳은 봉우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아내가 오면 항시 문수봉(쉬움)으로 길을 잡았는데 오늘은 혼자이니 문수봉(어려움)으로 들어선다.

오르막길이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진 가파른 암벽길을 타고 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등산화 바닥은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이고 팔로는 난간을 잡아끌어 몸을 바위 위로 올린다. 열심히 턱걸이 운동을 한 효과를 여기에서 보고 있다.

우와. 미끄러지면 뼈를 추리기도 힘들겠다.

등산화도 아니고 운동화 신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보기에도 아찔하다.

문수봉이 이제 코 앞이다.

문수봉 고양이 식구들. 북한산에 고양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뭘 먹고살지. 사냥을 하나?

가끔 길에 산비둘기의 깃털이 흩어져 있는 걸 보면 사냥의 흔적 같기도 하다.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는 분과 사진을 찍어 주는 분. 임무교대를 위해 다시 내려오라고 하니 그냥 못 들은 척한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마스크 너머로 서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뭔 바위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원래 계획은 문수봉에서 의상능선을 타면서 북한산성입구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의상능선으로 가는 이정표를 못 보고 지나친 듯하다. 여기부터는 지루한 성곽길이다. 동장대까지 터벅터벅 땅만 보며 가고 있다. 주변 경치는 미세먼지로 인해 흐릿하다.

드디어 동장대. 아직도 백운대까지는 2.5Km를 더 가야 하고 커피와 물은 별로 남지 않았다.

커피 딱 한 모금을 마시고 베이글을 한 조각 먹고 다시 힘을 내어 걸어가고 있다.

이제 백운대를 향해서.

용암문을 지나서는 그림자가 내 친구다. 발끝에 걸린 그림자를 쳐다보며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드디어 계단이 끝나는가 싶더니 바윗길이다. 바위에 꽂혀 있는 난간을 잡고 줄을 잡고 조심조심 오른다.

아직 다리에 힘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오후가 지난 지 한참이라 백운대 정상엔 등산객들로 가득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출근시간 버스정류장처럼 줄이 길다. 바위에 걸터앉아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시고 일어난다. 여기서 너무 오래 지체하면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어진다.

이제 하산길.

구파발 쪽 북한산성 입구까지 대략 4Km.

거의 전 구간이 내리막길이다.

사진을 찍는 것도 귀찮다.

쉬지 않고 내려온다. 생수병엔 이제 딱 한 모금의 물만 남아있다.


다행스럽게도 보리사를 지나오니 주차장, 화장실 그리고 자판기가 보인다. 이곳에서 모든 생리작용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다시 계곡길을 따라 내려간다.


서암사와 원효봉이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서 오히려 은은한 한옥의 선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드디어 도보가 끝났다.

내려와서 지도를 보고 있자니 내가   구간을 어떻게 돌아내려왔나 싶다. 아직은 쓸만한  다리를 칭찬해 주다가 어느 날  녀석들이 갑자기 파업이라도 하는 날이 오면 어쩌지 걱정이 된다.

아마 아내도 같은  걱정하면서 잔소리를 하겠지.


그래도 그냥 오늘에 충실하면서 살란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삶의 매력 아니던가?



2021년 11월 20일

족두리봉-원효봉-비봉-사모바위-승가봉-문수봉-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동장대-용암문-백운대-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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