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김하현, 어크로스
망원동에는 핫플레이스도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재래시장이다. 재래시장에서 칼국수도 사 먹고 시장도 보고 나오는 길에 찐빵(호빵과 다르다. 팥을 갈지 않아서 그대로 식감이 살아있다)도 사다가 냉장고에 얼려두고 한 개씩 덥혀먹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 곳이다. 시장 근처에 동네서점이 있었는데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업을 했다. 시장을 오고 가는 길에 가끔 들리던 곳인데 아쉽다. 서점을 가려면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합정 쪽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시장을 보기 전 슬쩍 들렸는데 예쁜 색깔로 포장된 철학책이 눈에 들어왔다. 윈터 에디션이라 쓰여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에디션이라고 읽힌다. 루돌프가 기차를 타고 가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읽히지 않겠는가.
한 때 대학생 필독서로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와 문학이야기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도대체 누가 이런 책을 읽을까 싶을 정도로 하품이 나오는 책들이다. 지루함을 꾹 참으면서 읽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기억나는 것은 한 줄도 없다. 여기에 그런 사람이 또 있다. 저자는 창고에서 먼지가 풀풀 나는 오래된 책을 찾아서 기억을 되살려 읽기 시작한다. 우레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다. 하지만 윌 듀란트의 철학에 대한 열정은 느꼈다고 했다.
책 읽기는 훈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헬스클럽에서 벤치프레스를 처음부터 자기 몸무게만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20kg부터 조금씩 근육량과 힘을 늘려야 바가 자기 목에 떨어지는 우습지만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이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책의 무게가 바벨의 무게만큼 무거워지게 되고 나의 눈꺼풀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책상에 소파에 엎어지게 된다.
이 책의 저자도 아마 이런 기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철학을 부담 없이 접근하게 할 수 있을까. 철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 듯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부터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 걸어야만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루소,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 비폭력의 간디, 니체, 보부아르 등 자기가 닮고 싶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철학을 하게 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자 또는 철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철학을 하는 것과 철학에 대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요리를 할 줄 아는 것과 먹을 줄 아는 것의 차이와 같다. 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거대한 벽이 있다. 물론 언젠가는 눈앞에 놓은 식재료를 보고 요리를 하고 싶다는 열정에 휘둘릴 때도 있겠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사실은 요리를 해보겠다는 욕망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
어떤 것에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아마도 나의 평소의 생각과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의 생각에는 공감이 되는 대신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신기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내용중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마음에 든다. 소제목조차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이다. 막연하게 쾌락주의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가 말한 쾌락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나니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추종하게 되었다.
'은밀한'쾌락이나 '숨겨진'쾌락 같은 말을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떠올리게 된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부재'라고 한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권력, 명성, 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상태라고 했다. 소확행과 YOLO라는 말 이전에 에피쿠로스가 있었다. "우리는 오직 딱 한번 태어난다. 두 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의 삶은 우연의 결과물이고 우연치고는 엄청난 기적이니 마땅히 주어진 삶은 즐기고 찬양해야 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가 정의한 쾌락의 단계에 저자는 아주 적절한 예를 들어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이 부분이 제일 맘에 들었다)
< 쾌락의 사다리 맨 위에는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욕망이 있다. 예를 들면 사막을 걸어서 통과한 후에 마시는 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 밑에는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이 있다. 사막을 통과한 후에 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마시는 소박한 테이블 와인 한 잔. 마지막으로 피라미드의 맨 밑에는 자연스럽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에피쿠로스가 말한 "텅 빈" 욕망이 있다. 사막을 걸어서 통과한 후에 물 한잔을 마시고 나서 테이블 와인을 마신 다음 마시는 값비싼 샴페인 한 병이 여기에 해당한다. 에피쿠로스는 이 텅 빈 욕망이 가장 큰 고통을 낳는다고 했다. 이 욕망은 만족시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텅 비어있고 끝을 알 수 없으니 당연히 채우기가 어려운 욕망이다. 텅 빈 욕망에 대한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나에게 있어 "텅 빈"욕망은 어떤 것이 있을까. 브런치에 글을 잘 써서 독자수를 천 명으로 늘리고 싶은 욕망? 천 명이 되고 나면 다시 이천 명에 대한 욕망이 생길 테지. 45점을 받아 온 아이가 70점을 받기를 바라는 욕망. 올해 판매 목표를 채우고 내년에 좀 더 큰 판매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욕망. "조금만 더"라는 아주 작은 소망 뒤에 숨어 있는 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라고 했다. 좋은 것이 주어지면 즐긴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저 감사해하며 즐기면 될 일이다. "조금만 더" 대신에 "충분히 좋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조금만 더" 주의자들은 얼마만큼이 충분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200명의 독자면 충분히 좋다. 지금도 내 글에 공감을 표시해주는 독자와 작가분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좋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다른 책들도 구해서 읽어 보아야 할까?
아니다.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