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먹기가 너무 어려워요(오늘의 일기)
아내의 생일은 어린이날이다. 특별한 휴일인 관계로 까먹고 지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내가 기념일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모든 생일과 기념일에 둔감하다는 말이다. 덩달아서 내 생일도 항상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가곤 한다.
이런 엄마와 아빠를 닮은 우리 집 꼬맹이도 역시 기념일은 쿨하게 넘어가 주곤 했는데 올해는 조금 달라졌다. 케잌 전문점에 엄마생일케잌을 주문해 두었다고 속닥거린다. 엄마 몰래 살짝 가서 찾아올 요량으로 잠깐 가출을 한다면서 설레발을 친다. 나두 산책을 다녀온다고 나온다.
포장이 계란을 담아주는 종이박스처럼 생겼다. 엄마한테는 삶은 계란 케잌이라고 하자는 둥, 케잌을 잘랐는데 삶은 계란이 나오면 재미있겠다는 둥,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조그마한 케잌을 들고 오는 딸아이의 발걸음이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딸아이가 이렇게 해 놓았으니 나는 저녁이라도 사야 할 것 같다. 연남동에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이탈리아 식당 같기도 하고 프랑스 식당 같기도 한 곳이 있다. 6시로 예약을 해두고 세 식구 살랑살랑 길을 나선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연남동 골목을 탐색하고 있다.
“아빠, 이곳도 맛있어 보인다. 담엔 여기에 와 볼까?”
오오 그래! 하면서 아내는 맞장구를 치고 있다. 아니 저녁 먹으러 가면서 다음번에 먹을 것까지 궁리를 하고 있는 모녀. 확실히 ‘꽃보다 빵’을 선호하는 모녀답다.
몹시 예의 바른(?) 우리 가족은 어떤 식당엘 가더라도 1인 1 메뉴를 먹고야 만다. 동파육을 떠오르게 만드는 삼겹살 요리, 살치살 스테이크 파스타 그리고 뭉근하게 토마토를 끓여 만든 스튜(쉐프의 추천 메뉴이기도 하다. 근데 이름은 기억 못 한다)를 주문한다. 게다가 음료도 제 각각이다. 사이다, 샹그리아 그리고 와인.
이런 몹시 예의 바른 가족에게 감동을 한 건지 주인께서 샐러드를 한 접시 서비스라며 주신다. 매일 아침 먹는 샐러드이기 때문에 절대 샐러드를 주문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왔는데, 이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맛있게 먹어줘야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와인과 샹그리아를 짬뽕해서 취한 건지 아내의 볼이 발그레해지더니 급기야 살짝 조는 모습을 보인다. 딸아이는 이런 엄마를 보면서 키득거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가 아내보다 술이 세다. 와인도 조금 마셔보고 샹그리아에 사이다를 부어 마시면서 ‘맛있다’를 연발한다.
서비스에 추가로 시킨 라따뚜이까지 클리어한 우리 세 식구와 식당 사장님 모두 몹시 만족한 모습이다. 소화도 시킬 겸 합정역에 있는 교보문고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딸아이가 어버이날 선물로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취향이 다르니 아무 책이나 살 수는 없다고 해서 진즉에 골라두었던 책 제목을 알려주었다.
그냥 주어도 되는데 굳이 어버이날까지 기다리란다. 예쁘게 포장을 해서 주어야 선물이라나 뭐래나.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몹시 예민해서 밤 까시같이 굴던 아이가 오늘은 왜 이렇게 다정다감할까?
호르몬에 변화가 생겼을까?
중간고사를 망쳤을까?
용돈이 필요한 걸까?
설마...철이 든 건 아닐 테지? 그건 재미없는데.
아무래도 좋은 것이 누가 뭐라 해도 우리가 낳은 자식이니 무슨 짓을 해도 (아직은) 귀엽다. ‘우리들의 부루스’에 나오는 맹랑한 고등학생도 있는데 뭘.
그래도 이 아이들에겐 동네 삼촌들과 할망과 아방들이 있어서 괜찮을 거 같더라. 아이들을 모두 공동 육아하게 될 것 같은. 예전처럼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우는 거지.
아내는 오늘도 베란다의 화분과 씨름을 하고 있고, 아이는 잠과의 전쟁에서 패한 채 꿈속을 헤매고 있다. 매우 평화로운 주말 아침이다.
참. 케잌속에는 실망스럽게도(?) 계란이 들어 있지 않고 과일이 들어 있었다.